당신의 시 ‘신현복시인’

신현복시인의 詩 들꽃 외 4편

신 현 복(申鉉福 )시인의 약력

 

1964년 충남 당진

2005문학.등단

시집 동미집2009년 다시올

시집 호수의 중심2017년 다시올

시집 환한 말2018년 다시올

시집 그쯤에서 눕길 잘했다2020년 시산맥

 

 

들꽃

 

다행입니다

내가 가장 아름답고 향기로울 때

당신 코끝이 닿았네요

모쪼록 저기 마을 어귀쯤을 지날 때까진

내 향이 아주 쪼금만이라도

여전히 묻어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당신 눈빛도 향기

참 고우네요

 

 

 

호수의 중심

 

 호수는 중심을 고집하지 않는다.

 

 동서남북의 가운데가 중심이라고 주장하지도 않고, 가장 수심 깊은 곳이 중심이라고도 주장하지 않는다. 호수는 누구에게든 자기의 중심을 내어준다. 어떤 차별도 두지 않고 모든 것을 중심으로 받아들인다. 청둥오리나 황소개구리, 청개구리나 소금쟁이에도, 물방개나 실잠자리에 까지도 공평하다. 심지어는 바람에 날려 온 꽃잎에 조차 기꺼이 중심을 내어준다. 깜박 잊는 일도 없다. 빗방울 하나도 홀대하지 않으며 성심껏 초심으로 대한다. 하여 비가 오는 날에는 무수한 빗방울 하나하나가 다 중심이어서

 

 호수 전체가 통째로 중심이 된다

 

 

 

빈집

 

바람은 종종 다녀갔답니다

가랑비도 가끔씩 왔다갔구요

폭우랑 뙤약볕도 잠시 들렀다네요

꽃을 데리고들 왔더랍니다

벌이랑 나비가 놀아줬구요

새들 조잘거림도 여전하더랍니다

마당 가 늙은 감나무, 떫은 하루를

달게 우리며 서 있는 것까지

다들 여전하네요

장독대 간장독 뚜껑 열려있는 것과

집 밖을 서성거리는 나 외엔

그대로여서 하 눈물 납니다

, 뒤란 두릅나무도 그대로구요

대문도 잠기지 않았네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냥

멀리서 간만에 들른 먼 친척인 척

외려 안부만 돌려 물었습니다

나만 빈집에 갇혀 살았네요

왼 가슴 쪽이 저립니다

해가 오섬에 걸렸어요

동구 밖 도라문의 막차 시간도

예나 지금이나 여전하겠죠?

가야해요, 근데 그림자가 자꾸

대문 쪽으로 걸어가요

* 오섬 : 충남 당진시 송산면에 있는 지명

 

 

 

별천지

 

 이젠 다 그쳤겠지 싶었는데 다시 장대비가 쏟아졌다 대밭집 추녀 밑에서 비가 멈추길 기다렸다 잠시 후 검정 하양 장화를 신은 오섬 아이들이 노랑 파랑 우비를 입고 우산을 쓰고 지나갔다 비를 장난감 삼아 즐겁게 장난치며 느릿느릿 지나갔다 곧 빗줄기가 가느다래져 맞고 뛰어갈 수도 있었지만, 그냥 그곳에서 한참을 더 서 있었다 중선重船이 정박하는 별천지 오섬 아이들이 마을 끝 우리 집 지나 들판까지 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한참을 더 기다렸다 다행히 대밭 푸른 빗소리는 여전히 장대비였다 그날 밤 비 갠 하늘은 별 천지, 유난히 크고 밝았다 유성 하나가 내 심장에 박혔다

* 중선重船 : 큰 고기잡이배

 

 

 

 

복도식 아파트

 

보통은 312호 지나고

311호 지나 계단으로 접어들어

내 모습이 보이지 않을 때쯤

현관문 닫는 소리가 들린다

가끔 조금 일찍 들릴 때도 있지만

계단으로 층을 다 내려오도록

들리지 않을 때가 더 많다

 

그렇게 기도가 긴 날에는 영락없이

 

복도 벽에 기대어 환하게

손 흔들어 주는 모습이 보인다

가관인 건 출근하기 싫다고

농을 던지면 전혀 망설임도 없이

그러고 싶으면 그러라고 한다

믿을만한 구석도 없는데

웃으면서,

 

그런 날은 늘 기도가 좀 더 길다

 

오늘 아침에도 그랬다

태양은 그 복도 반대편에서

한참 후에야 뜬다

 

- 2시집 호수의 중심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