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시 ‘나호열시인’

나호열시인의 詩 풍경과 배경 외 4편

나호열 시인 약력

  * 1953년 충청남도 서천출생. 경희대 대학원 철학과(박사) 졸업.

* 1986월간문학신인상 시 등단.

* 시집 안부』『안녕,베이비박스』『당신에게 말걸기,타인의 슬픔』 『촉도,18

* 수상 시와 시학중견 시인상(1986). 녹색시인상(2004). 한민족문학상(2007).

한국문협서울시문학상(2011). 충남시인협회문학상(2015). 현재 서일대학교 민족문화학과 겸임교수. <도봉학 연구소) 소장. <한국탁본자료박물관> 관장. <미디어서울> 이사장. 르네포엠발행인.

 

풍경과 배경

 

 누군가의 뒤에 서 배경이 되는

 그런 날이 있다

 

 배롱나무는 풍경을 거느리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배경이 될 때 아름답다

 강릉의 육백 년 배롱나무는 오죽헌과 함께, 서천 문헌서원의 배롱나무는 영정각 뒤에서 여름을 꽃 피운다 어느덧 오죽헌이 되고 영정각이 되는 찰라 구례 화엄 산문의 배롱나무는 일주문과 어울리고 개심사 배롱나무는 연지에 붉은 꽃잎으로 물들일 때 아름답다 피아골 연곡사 배롱나무는 가파르지 않은 돌계단과 단짝이고 담양의 배롱나무는 명옥헌을 가슴으로 숨길 듯 감싸 안아 푸근하다

 

 여름 한 철 뙤약볕

 백일을 피면 지고 지면 또 피는

 배롱나무 한 그루면 온 세상이 족하여

 그렇게 슬그머니 누군가의 뒤에 서는 일은

 은은하게 기쁘다

 

 

 

당신에게 말걸기

 

이 세상에 못난 꽃은 없다

화난 꽃도 없다

향기는 향기대로

모양새는 모양새대로

, 이쁜 꽃

허리 굽히고

무릎을 꿇고

흙 속에 마음을 묻은

, 이쁜 꽃

그걸 모르는 것 같아서 네게로 다가간다

당신은 참, 예쁜 꽃

 

 

 

금서禁書를 쓰다

 

그날 밤 나를 덮친 것은 파도였다

용궁 민박 빗장이 열리고

언덕만큼 부풀어 오른 수평선이

내 몸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빨랫줄에 걸린 집게처럼

수평선에 걸려 있던 알전구가

몸의 뒷길을 비추었다

상처가 소금꽃처럼 피어 있는 뒷길은 필요 없어

거칠지만 단호하게 일회용 밴드는 말을 막았다

두껍기는 하나 알맹이가 없는 책은

온통 상처를 감쌌던 일회용 밴드의 흔적으로 가득하다

 

아무도 읽기를 바라지 않는 나무는 금서다

상처를 어루만져 줄 네가 필요하다는 말은

달콤한 만큼 거짓말이다

거짓말이 가득한 책

온 힘을 다해 부둥켜안았던 파도는

날이 밝자 저만큼 물러가 있지 않은가

몸을 떠난 상처는 또 무엇을 그리워해야 하는지

해는 뜨기도 전에 졌다

 

 

 

冬柏

 

찬 서리 기운을 받아야 붉어진다지

남들과는 한 자리에 어울리기 싫어한다지

한꺼번에 무너지고 만다지

어디 그것이 남의 마음이던가

한 밤을 새워

님에게 편지를 쓰다

못내 부끄러워 눈 들어보니

, 저기

수평선 저 너머에 작은

점점 커지는 불덩이가

동백 꽃 봉오리가

푸른 꽃대에 받쳐져 올라오더니

울컥울컥 븕어지더니

수만 송이의 동백꽃으로 찬란히

떨어지더니

해 뜨지 않은 곳 그 어디에 있으랴

*추암은 강원도 삼척시 바닷가에 솟아 있는 바위이다.

 

 

 

눈물이 시킨 일

 

한 구절씩 읽어 가는 경전은 어디에서 끝날까

경전이 끝날 때쯤이면 무엇을 얻을까

하루가 지나면 하루가 지워지고

꿈을 세우면 또 하루를 못 견디게

허물어 버리는,

그러나

저 산을 억만년 끄떡없이 세우는 힘

바다를 하염없이 살아 요동치게 하는 힘

경전은 완성이 아니라

생의 시작을 알리는 새벽의 푸르름처럼

언제나 내 머리맡에 놓여 있다

나는 다시 경전을 거꾸로 읽기 시작한다

사랑이 내게 시킨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