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시 ‘이초야시인’


이초야시인의 詩 풀의 노래 외 4편

이초야시인 약력

 

들플처럼 살고 들꽃처럼 피다

칠산나비

 

 

풀의 노래

 

알려지지 않은 이름

거주지 불명

 바람 부는 대로 춤추다가

바람 자는 곳을 찾아 현주소를 두지만

바람의 영토에 사는 나의

현주소는 유동적

 

노지를 전전하다가

담 밑에 자리 잡고 살다가

잡초로 여겨 뿌리째 뽑힌 적도 있지만

꽃밭에 정착하려고 기를 써보다가

사람 손에 떠밀려 나가기를 여러 번이지만

 

그래요, 이래 사나 저래 사나

그대는 사람답게 살면 되는 거고

나는 풀 같이 살면 되는 거지

 

훗날

혹시나, 그 누군가 소식 물으면

질경이처럼 살다가

꽃이 되었을 거라고 말해주오

 

 

 

사물놀이

 

너도 치고

너도 쳐라

박살 날 것 같지만 단단하리라, 나는

끊어질 것 같지만 참 질기리라

 

살다 보면

흥을 돋우는 것도 있고

뒷북치는 것도 있을 것이고

속내 드러내지 않는 것

훤히 속 보이는 것도 있을 것이다

소리만 요란한 것도 있고

심금을 울리는 것도 있으리라

 

세상살이

타악기처럼 수난 겪으며

서로 다른 것들이 모여서

서로 다른 소리로

신명 나게 한바탕 추는 춤

 

 

 

 

너만 그런 게 아니야

풀은 쓰러지면서 꺾이지 않는 법을 알게 되고,

나팔꽃은 하루가 비비 꼬이면서 꽃이 되고,

공은 차이면서 골인되고,

넥타이는 묶여야 제 모습을 하고,

못은 두들겨 맞고 나서 제 몫을 하고,

종은 부딪히면서 아름다운 소리가 난다

명성을 날린 길은 수없이 밟히고 나서

비로소

이름을 얻는 것이다

 

 

 

봄비

 

너였구나

때만 되면 가슴앓이하는 밤 

뒤척이며 돌아누울 때마다 들리는 소리

내가 울고 있는 줄 알았는데

 

 

너였구나

밤새도록 상처 씻는 소리

내 아픔 호소인 줄 알았는데

 

너였구나

 

내 속 터지는 줄 알았는데

 

너와 내가 실컷 울고 나면 

그 아픔 꽃이 되어

흐드러지게 꽃향기 날리겠지

 

 

 

들꽃 곁에서

 

천 번 바람맞고 피는 나는

그처럼 화려하거나 진한 향기를 지니지 못했지만

바람도 울고 낮달도 울고 간

나에게도 독특한 향기가 있다고요

 

나는요, 바람 따윈 두려움의 대상이 아니라

그저 느낌표쯤으로 생각해요

때로 바람은 내게 상처 주지만

그 상처 때문에 내 향기 멀리 가죠

 

, 귀 기울여 봐요

속울음 들리나요

죽은 듯 살려고 하면 광야는 나를 흔들어

그대로 살아있게 하죠

긴장의 끈을 놓지 않게 하거든요

바람의 영토에 사는 게 참 다행이에요

나에게 태풍은 청량제죠

 

살다 보니 광야가 참 편해졌어요

그래요, 안식처로 알고

그냥 여기서 살 거예요

그 세상이나 여기나 놀이터는 마찬가지거든요

 

 

 

 

황소

 

그가 늘 짊어진 것은 멍에였다

그를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는 것은 고삐였다

그의 유일한 장식품은

신발도 아닌 코뚜레였고

그가 생각을 바꿀 때마다

걸고넘어지는 것은 장식품이었다

 

그가 지나온 길은

바람 불 때마다 앞이 보이지 않는 황톳길이었고

한평생 발 디딘 곳은

발 빼기 힘든 질퍽질퍽한 땅이었다

 

그는 평생을 말하지 않고 살았다

세상에서 가장 큰 눈뜨고

나를 지켜보고 있었을 뿐이다

 

그처럼 살지 않겠다고

그처럼 살지 않겠다고

잠에서 깰 때마다 되새김질하듯 중얼거리던

내가

그 길을 가고 있다

 

 

 

단풍

 

가을 산이 아름다운 것은

무지개가 그렇듯

한 가지 색으로 통일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나의 가지에서 커간 이파리도 조금씩은 서로

다른 색을 내기 때문이다

모진 풍파 이겨내면서 생긴 자기만의 독특한 색깔로

다른 것들과

한데 어우러져 살기 때문이다

가을 숲이 그렇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