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시 ‘황경식시인’


황경식시인의 詩 냉장고에 넣다 외 4편

황경식시인의약력

 

19941현대시학으로 등단

200110월 시집 실은, 누드가 된 유리컵(문학세계사)

 

 

 

냉장고에 넣다

 

철모르는 눈사람을 냉장고로 데려왔다

 

몰래 키울 작정이었다

무얼 먹일지 어떻게 말을 걸지는

생각해보지 않았다

 

가나다라를 불러줄까

天地玄黃을 소환해야 하는지

 

꿈속에서 구조요청을 받은 것 같았다

눈사람도 꿈을 꾸고 있었는지

무엇을 채굴하던 중이었을까

 

하얀 절망으로 배를 채우고 있었다고 한다

 

 

 

 

계단

 

끝나지 않는 계단을 올라갔다

어디까지 이르러야 하나

하늘 꼭대기일까

섬망의 어깨 너머일까

오르고 올라갈수록

더 아득하게 펼쳐지는

거지중천의 발치와 허리

걸음을 뗄 때마다

길 끝은 더욱 멀어지고

너는 자꾸만 희미해졌다

 

*거지중천 (居之中天):{명사} 텅 빈 공중.

 

 

 

 

입술에 이끼를

 

 가보지 못한 그쪽 나라에 미리 정이 들어버렸네. 눈먼* 바람이 지배하는 땅, 나 미동도 하지 않으리. 우수에 가득 찬 꿈도 버려두고 오만 년을 산 것처럼 그냥 오래 엎드려있겠네.

 

 그곳에선 뛰어다니는 개들도 쓸쓸하리라. 나무도 지붕도 반쯤 고개가 기울어지고 한쪽 귀가 맞은편 귀 보다 조금 더 길어졌네. 푸른 하늘에 얼굴이 부딪칠 뻔하였어. 모든 색의 경계가 점점 멀어지고 둥근 얼음알에서 불의 씨앗이 떨어졌네. 불멸의 말을 가슴속에 품었을까, 열흘에 한 번쯤 깊은숨을 뱉었네. 물음도 대꾸*도 아주 외면하리라. 순한 영혼을 담아둘, 무늬 좋은 가방도 포기하겠네. 다정한 친구도, 닫힌 귀의 신도 찾지 않으리. 바닥 모를 단잠을 그리며 바위처럼 눈을 내리깔았네. 입술에 이끼를 가득 덮어두리라.

 

 

 

 

점점點點

 

 

꿈 깨지 마라, 몇 개의 생을 건너야 하리니

우리는 얼마나 쉽게 부서지는가

넘어지며 부딪치고

 

입은 열리지 않았고

귀도 눈도 떨어져 나가는구나

부대끼며, 깨어지다 돌아서고

 

멀어져 그리운 만큼, 닳고 닳아

마음의 실밥이 터져버리는구나

점점點點 울음으로 흩어지고

 

이제, 시린 별이 되어 반짝이기 전에

다시 여위고 지친 등을 서로 기대며

마구 부딪치다 둥글어져야 하는구나

 

 

 

첨언 添言

 

전생이 부디 모기는 아니었기를

모질게 타인의 피를 빨아먹는

악덕 자본주와도 상관없었기를

 

너무 당당하고 진부한 添言이 덧붙어

조금은 못내, 부끄러웠다

 

그건 너, 그건 너라는 유행가 대신

성부, 성자, 성령의 이름을 암송했기를

 

어둠이 먼저 입 다물며 모여들었고

얼음을 채운 종아리가 계속 삐걱거리며

마지막 두루마리처럼 풀려나가는 길

 

돌아선 어깨 위엔 낯선 달과 별이, 우우

부지의 生面과 대면하려는 찰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