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시 ‘권이화시인’

권이화시인의 詩 아침의 노래 외 4편

권이화시인 약력

 

경북 안동 출생

2014미네르바를 통해 등단

시집어둠을 밀면서 오래달리기

 

 

 

아침의 노래

 

바다에 갔다

갓 부쳐낸 계란프라이와 싱싱한 야채샐러드가 차려진 아침이었다

세상의 모든 비밀의 궁륭을 벗은

어머니의 식탁이었다

 

릴케가 장미에 붙인 한 곡의 마티나타 같이

 

닿을 듯 닿지 않을 듯 바다의 안쪽으로 멀리 흘러가보았다, 마침

성에서 장미가 피기 시작했고

천개의 태양이 높이 떠 있구나, 그렇지만 무슨 소용

어머니는 사라져 새는 제자리로 돌아가지 못하고

나는 먹을 수가 없네

 

라벨이 죽은 왕녀에 붙인 한곡의 마티나타 같이

 

보일 듯 보이지 않을 듯 바다 바깥으로 멀리 흘러왔다 흘러가는,

그대 마리아여

일요일에는 로마로 가 영화를 보고

만종이 울릴 때 감자 바구니 앞에서 기도를 할 수 없겠구나

 

세상의 모든 아침 나는 그대를 본다

나무에 잎이 타고, 새의 울음 무성해지는 뜨거운 물방울을 싣고

기차가 바다로 흘러간다

흘러오는 동쪽의 언어가 아름다워

 

아침에 붙이는 한곡의 마티나타 같이

 

 

 

도원

 

배가 동굴로 들어갔다

푸른옷 입은 사람들이 강가에서 춤추며 노래했다 복숭아꽃은 만발해

손님들이 오고 나는 아이가 되었다

 

아버지는 지금 어디에 계실까 이곳에 오래 살아

신선이 되었다는데

술은 흘러넘치고 복숭아는 익어간다

 

잠시 배에서 내리자 동굴이 훅 사라졌다

 

물가에서 서성거리다 한 노인을 보았다

노인은 무릉도원으로 가는 배를 기다리다 벚꽃 지고 눈 내려

집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흰옷 입은 사람들이 손을 흔들었다

언제부터 물가에서 놀기 시작했을까 공손히 복숭아꽃을

흔들어 주었다

 

배가 다시 올라왔다 찰랑거리는 내 발로는 닿을 길 없어

나는 행선지를 물었다

종착역은 세외도원입니다

 

나는 집으로 돌아가기를 망설이던 노인을 떠올린다

사는 곳은 어디일까

아버지가 준 녹슨 거울을 비추어 보다가

 

나는 밖으로 나왔다

 

 

 

유리 안은 깨진 장미와 나비 사이

 

빈 유리잔을 보면 그 속에 노란 달을 띄우고 싶어요

 

얼굴을 가린 장미에게 얼굴을 찾아주고 싶어요

 

축축한 골짜기의 첫 눈은 몇 겹의 나비 그늘로 쌓여 있어요

 

한쪽에서 검은 달을 만들며 캄캄해지는 사람이 있어요

 

아침마다 투명하고 여린 나비가 태어나듯

 

오늘도 유리창 너머 하얀 상제나비가 푸른 공중으로 날아가요

 

나비 나비 흰나비, 여긴 봄이에요

 

마음과 입이 마주치듯 유리잔에 긴 빨대로 살짝살짝 검은 달의 즙을 빨아먹으면

장미가 피고 나비가 날아가 비어서 채워지는 세계도 있겠지요

 

옆구리를 빠져나간 시간이 얼음같이 차가워지고 있어요

 

유리 안을 헤아리니 먼 하늘에서 비가 쏟아져요

 

장미담장을 넘어 간 나비 쪽으로 모래시계를 돌려놓고

 

내일 아침엔 저 빈 잔에 노란 해를 띄우면 안 될까요?

 

 

 

탄생

 

 밤이 오렌지색 네 이마를 들여다볼 때 내 잠 속 오렌지꿈 잠들지 못하고

 이 동네 잠시 피고 지는 꽃들 속에서 처음 본 달빛이 낯설어 너는 울음을 터트렸지 그러나

 산 너머 팬파이프를 부는 요정에게 따르릉 전보를 치는 아버지 옆에서 달의 솜털을 뽑아 날개옷을 짜다 혼곤히 잠든 여인이 있었고

 달빛에 홀려 놀러 나온 큰유리새가 날개옷 겹겹마다 깃을 붙였는데

 뽀로롱뽀로롱 오렌지꿈 밤새 달로 가는 달빛마을 할아버지는 구부러진 손으로 예언서의 먼지를 털어냈다

 먼 오렌지 뜰로 날아가 새 신전을 세울 네 샛노란 깃에 달빛을 촘촘히 달았지

 꽃의 인사를 바쁘게 전해주는 바람이 포로롱포로롱 달동네의 환한 겨드랑이 사이로 월광소나타를 연주하곤 했다

 

 

분홍의 세계

 

 두통이 이는 하루를 새 울음으로 행군다 나무와 나무를 옮겨가면서 부지런히 울음을 우는 새 봄이 가는 새 그리고 겨울이 오는 새

 새 발자국을 따라 겨울 숲에 이른다 웅크리고 앉아 새들의 세계로 들어간다

 차가운 시대를 노래하는 새 새들의 종말을 예감하는 새 울면서 날아가는 새 태양이 뜨는 머리 위에서 활짝 깃을 펼치고 목청껏 우는 새

 숲으로 찾아온 겨울은 길다 짙은 나무 그늘이 겹쳐진다 눈이 내리면 가라앉은 나뭇잎 밑에서 겨울을 나는 벌레들이 작은 눈을 뜨고 새 울음을 울었다

 종일 왼쪽 머리를 새 한 마리 쪼고 있다 터널을 지나간다 가방은 무겁고 겨울바람이 태엽을 감는다 나는 비상하려고 우는 새를 키운 적이 있었을까

 다시 봄을 상상하면서 노래하는 새의 지저귐들 겨울 숲을 깨운다 새 발자국을 따라 새의 그늘을 열면 새소리 끝으로 분홍이 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