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시 ‘노두식시인’

노두식시인의 詩 파꽃 외 4편

노두식 시인 약력

1991 문학세계 등단. 인천문학상 수상.

시집 기다리지 않아도 오는 것, 가는 것은 낮은 자세로, 떠다니는 말.

 

 

파꽃

 

너를 생각할 때마다

나는 왜

너의 하얀 부분만 기억이 날까

 

나에게 네가

너의 전부가 아니었다면

너에게 나는 또

얼마만큼의 부분이었을까

 

, 사랑하고 싶은 것만 사랑했던 사랑

 

사랑을 떠나보낸 후

내 게으른 눈

이제야 온전한 너를 보겠네

 

 

 

줄풀의 구름

 

줄풀 잎끝에 이슬이 맺혀 있다

시간의 초점에 맺히는 것들은 촉박하다

맺힌 순간 위험에 빠지는

너는 매달린 채로 허공에 손을 내민다

맺히면 다음에 맺히는 것이 또 생겨나고

맺히는 것과 더불어 완성되는 둘만의 관계가 있다

균형에 대해 골몰하는 구름은 형상을 만들어 놓는다

흩어지다가 뭉치면 변조된 노래가 생겨난다

맺힌 것들에게 내미는 손은 불확실하다

출처가 불분명한 자들의 손은 안전하지 않다

풀잎의 날카로움은 매달린 것들을 잠시 고정시켜

늘여 놓은 시간이 진흙밭에 닿는지를 가늠케 한다

맺힌 것들의 영역에 줄기를 내리면 다시

맺힐 것들을 위해 줄풀은 한동안 조정을 거친다

구름은 남아 있는 것을 버티게 하는 최선의 방편이다

낫을 들고 줄풀 뒤에 숨어 있는 나는

제풀에 황색 신호등처럼 깜빡이고 있다

 

 

 

출렁이는 보라

 

우는 소리가 들렸다

웃는 소리 같았는데 옆으로 돌아눕자

영락없는 울음이었다

 

물길을 돌리면 물 색깔이 바뀌었고

물은 달리다가 꿈 앞에서 느려졌다

묵직한 소리에는 좀 더 빠른 장단이 필요했다

강약에 따라 젖는 시간을 줄일 수 있을지 고심하였다

 

연결이 끊기면 길은 어둠 속에서

살아 있는 장치처럼 구불거렸다

희미한 것들은 생각대로 물길이 되었고

물처럼 출렁이는 발로 걸음을 옮길 때마다

비릿하고 슬픈 진동이 전해 왔다

 

조율에 익숙한 이들은

머릿속 환하게 타오르는 꽃불 같은 순간이

웃음이 된다고 하였다

웃음도 슬픔 같은 소리를 낸다고 하였다

 

하얀 손가락들이 밤하늘을 끌어당겨

돌탑을 쌓듯 소리를 덮었다

곧은 나무로 엮어 놓은 강둑 아래

눈물이 말라 버린 눈들이 왈칵대며 흘러갔다

 

별이 이마 위로 쏟아지고 밤은 보랏빛으로 깊어 갔다

몸을 바로 눕히자 웃는 소리가 들려왔다

 

 

 

당신의 맨발

 

공중을 날아가는 새의 빨간 발가락이 보이나요

맨발들이 사는 세상에서

바닥에 흙에 가장 가까운 발을

두 겹으로 싸매고 나는 길을 걷습니다

 

도마뱀의 신발을 파는 가게는 없지요

구관조의 발에 신을 신겨 본 적이 있나요

시간도 바람도 자취가 없다지요

그들도 맨발인 게 분명해요

 

발을 가리는 이유에 대한 변명들은 분분합니다

길은 원래 신을 신고 걸어야 하겠지요

마음속 거미가 자아낸 무수한 줄로 길을 만들었으니

발의 무언가를 돌돌 말아 감추어야 할 테니까요

신발이 가리개인지는 중요하지 않아요

나는 풀무치나 펭귄의 발에

신발을 신은 내 발을 이따금씩 견주어 봅니다

 

나의 맨발바닥을 들여다보면

한 번도 본 적 없는 심해 생물들이 헤엄쳐 다니고

산호 모양의 어릴 적 보물들이 녹슨 채로 버려져 있었지요

 

발바닥의 깊이가 마음에 반비례하던 때가 생각납니다

간혹 맨발로 걸어 다니는 당신을 보면

나는 왠지 당신의 휘파람이 되고 싶어요

 

 

 

오래된 말

 

그대가 나에게

이 세상에서 으뜸 환한 말 한마디를 들려 달라 원하면

정녕 듣고자 하는 그 말을

나는 기쁜 마음으로 얼른 되물을 수밖에

어쩌면 그 말이 내가 듣고 싶어 하는 단 한마디일 테니까

 

그대가 나에게 하고 싶은 말은

내가 그러하듯이 빛나는 것들에 관한 것일 테고

나도 그대처럼

빛나는 것이 무엇인지 이미 알고 있으니까

 

빛에 대해 생각할 때마다

우리는 어디에서나 서로가 같은 밝기로 반짝일 것이다

 

그리고 사랑이 이제금

파장 이외의 아무것도 아닌 방식이 되었더라도

우리의 오래된 말들은 변함없으므로

나는 언제라도 그로 인해 처음처럼 수줍어서

따뜻해진 가슴이 조마조마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