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시 '박남희 시인'

박남희 시인의 詩 곡선이 직선을 끌고 간다 외 4편

박남희 시인 약력

1996년 경인일보, 1997년 서울신문 신춘문예로 등단.

시집 폐차장 근처,이불속의 쥐

고장난 아침,아득한 사랑의 거리였을까

평론집존재와 거울의 시학

현재 시립대와 동국대에서 시를 강의하고 있다.

 

 

곡선이 직선을 끌고 간다

 

지금까지는 직선이 곡선을 끌고왔다

아니, 그런 것처럼 보였다

주위를 살펴보면

주변은 경부고속도로 , 호남 고속도로

온통 직선으로 포장되어 있다

직선의 힘이 느껴진다

골목길과 오솔길은 직선의 힘을 피해

어느 구석으론가 숨어들었다

하지만 봄이 되면 아지랑이가 피어나듯이

곡선은 때가 되면 어디선가 기어나온다

여기저기 새 소리가 들리고 꽃이 피어난다

곡선이 새롭게 부활한다

곡선이 직선을 끌고 간다

4 계절 , 4 대강은 모두 곡선이다

그것들을 함부로 직선으로 만들 수는 없다

1 초에 수십만 킬로를 달려가는 빛도

언뜻 보면 직선 같지만 사실은 곡선이다

그런 빛들도 마음에 들어오면 휘어진다

그대가 아름답게 보이는 건

그대의 곡선이 내 마음에 들어와

수많은 곡선을 만들었기 때문이다

 

 

 

 

 

왜 그랬을까

 

신은 붉은 끈 팽팽해지는 새벽 수평선에

빨래 대신 새를 널어두셨네

 

왜 그랬을까

왜 그랬을까

 

바다 깊숙이 물을 끌어올려 이상한 빨랫줄을 만들어놓고

왜 그랬을까

 

그 빨랫줄은 말리는 빨랫줄이 아니라

말라있는 것들을 다시 촉촉이 적시는 빨랫줄이라는 것을

새에게 알려주려 했을까

 

전깃줄에 제비들이 모여 앉아

더욱 생생하고 왁자한 줄을 만들 듯

그녀의 수평선을 확대해보면

그 위에 수많은 새들이 재잘거리며 살고 있다는 것을

그녀는 왜 미리 깨닫지 못했을까

 

물이 새이고 새가 물이 되는 은유의 빨랫줄에

새벽마다 붉은 하루가 열려

공중으로 둥둥 떠오르던 이유를

그녀의 몸에서 재잘거리던 새들은 왜

진작 말해주지 않았을까

 

왜 그랬을까

 

 

 

사라진 냄새

 

언제부턴가 내 주변의 냄새가 달라졌다

구름 냄새나 바람 냄새 , 꽃 냄새 대신

돈 냄새 , 스펙 냄새 , 권력 냄새 같은 것들이

새로운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돌이켜보니 코가 없는 것이 아니라 발이 없다

고향냄새도 어떤 발을 따라 아득한 곳으로 사라져

향수 (鄕愁 )라는 말도 머릿속에 떠오르지 않는다

나는 지금껏 여전히 같은 곳에 살고 있지만

지명이 리에서 동으로 바뀌었을 뿐

이미 고향은 사라지고 없다

 

논과 밭과 개울물이 흐르던 곳에

낯선 건물들 밑으로 하수가 흐르고

덜덜거리며 소달구지가 오가던 신작로에는

매연을 매단 속도가 재빨리 횡단보도를 지나고 있다

 

킁킁 새삼 내 몸의 냄새를 맡아보니

외롭던 청춘을 슬쩍 시 () 쪽으로 끌고 왔던

발이 더 이상 보이지 않는다

 

냄새에도 발이 있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얼음의 연대기

 

얼음에도 역사가 있지

한번쯤 물이 되고 싶은 역사

구름이 되고 싶은 역사

그리하여 어디론가 끝없이 흘러가

꽃으로 피어나고 싶은 역사

 

그런데 자신들의 바람처럼 흘러간 역사가

이 땅에 얼마나 있을까

 

지리산이 4,3 이 되고

4.19 가 광주가 되는 역사를

누가 함부로 얼음의 연대기에

편입시켜 놓았을까

 

물이 추위를 이기지 못하면 얼음이 되는 거라고

잘못 알고 있는 자들이 세상에는 의외로 많지

그들은 흐르기를 거부하는 딱딱한 물의 옹고집도

쉽게 녹일 수 있는 꽃의 존재를 모를 거야

 

꽃의 망치를 두려워하지 않는 얼음은

이미 얼음이 아니야

 

겨울은 왜 번번이 얼음을 얼리고 오면서도

꽃을 꿈꾸고 있었는지

그것이 역사의 속성이란 걸 아는지

 

지나온 겨울을 뒤져보면

얼음에도 꽃의 역사가 있지

한 번쯤은 달콤한 몸이 되어 꽃피고 싶은 역사

그래서 한겨울에 피는 꽃이 있는 거야

 

얼음 속에 봄의 목소리가 숨어있다는 건

얼음의 결정이 꽃모양인 걸 보면 알 수 있지

 

 

 

내 안의 새

 

, 저 새는 왜 갑자기

서른 쪽으로 날아갈까

 

나는 지금 마흔을 한참 지나

예순 쪽에 서있는데

 

저런 철새는 처음 본다고

누가 내 밖에서 자꾸 수군대는데 ,

 

저 새는

서른 쪽을 지나 날아가다가

갑자기 수직으로 급강하하더니

 

풍덩

 

출렁이는 남의 나이 속으로 뛰어드는데

 

치매는 아닐까

누가 내 밖에서 자꾸

내 옆구리를 쿡쿡 찌르는데

 

그런데 돌연 또

솟아오르면 어쩌나

 

또 누구의 하늘을 더럽히려고

 

천방지축

수직과 수평의 나이도 까먹은 저 새는

새장인 내 몸의 나이를

우주만큼 늘여놓고 또

 

어디로 향하고 있는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