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시 '김희근 시인'

김희근 시인의 시 사랑이 무어냐고 물으신다면 외 4편

김희근 시인

 

경북 상주시 함창 출생

함창중고등학교 교장

 

 

사랑이 무어냐고 물으신다면

 

신라의 향가 '헌화가'를 모르시나요

 

붉은 바위 끝에 (저 꽃)

잡고 있는 암소 놓게 하시고

나를 아니 부끄러워하신다면

꽃을 꺾어 바치오리다

 

이러한 사랑, 하시라

 

 

 

팔놈

 

나는 시팔놈이고 싶다

누구처럼 번듯한 시집도 내보고

담은 몇 푼이라도

를 팔아 원고료를 챙기는

그래서 나도 시를 파는 놈으로 회자되면 좋겠다

 

몇 가지 인적사항과 함께 계좌번호를 찍어달라는

출판사 직원의 자상하고 친절한 안내에

무얼 그런 걸 다, 황송해서 쑥스러워하다가

절차가 그렇다니 그러마 하고

상대방 전화가 끊기길 기다리며

앗싸아! 속으로 쾌재를 부르는

그리하여 지인들에게 은근슬쩍 티를 내는,

이런 상상을 골백번도 더하곤 미소 짓지만

 

누가 뭐래도 나의 간절한 소망은

팔놈이고 싶다!

 

 

 

이팔청춘

 

이팔청춘에,

 

춘향이는 좋았것다!

어느 화창한 날 나무그늘에서

훠어이 훠어이

그네를 타며

담장 너머 바깥세상을 넘보고

 

나는 주말에도 공부방에서

열공하다, 졸다가

가끔은 틈틈이

검정 뿔테의 두툼한 안경알을 닦으며

끔벅끔벅 졸음이나 내몰고

 

 

 

 

대사(大事)

 

앞뒷집 살던 고교 후배가 높은 벼슬 고관대작이 되었다고 반가운 맘에 말씀 드렸더니 어머니께서 조용히 중얼거리신다.

 

우리는 그 집 어른들 큰일에 다 갔는데, 너 아버지 돌아가셨을 때 그 집에서는 아무도 오지 않았다.”

 

어머니에게 큰일은 벼슬이 아니라 이승에서 저승으로 건너가는 일이었다.

 

 

 

돼지야식 벽화

 

함창 마을미술 프로젝트 사업 차 그림을 그리러 온 화가 한 분이

소주를 곁들여 아구찜을 아귀처럼 먹어대다 말고는

조선 천지 아구찜 솜씨가 누님을 따를 자가 누구냐고

엄지를 한껏 치켜세우더니 이것도 인연이라며

펄펄 날뛰는 아귀를 두 마리나 벽에다 처억 던져놓았다.

온 방안이 깊은 바다 속인 양 쫘악 펼쳐지고

여사장도 한 마리 인어가 된 듯 지느러미를 휘저으며

오시는 손님에게 그림에 얽힌 사연을 수캉아지 좆 내밀 듯

식사가 끝날 때까지 곁에 앉아 걸쭉하게 늘어놓는다.

 

아따, 두 마리 아구가 짝지어 노니는 걸 보니

영감이라도 하나 있어야 제격이겠는걸.

아이구 지랄한다, 영감은 무슨, 그럼 영감이나 구해주고 지랄을 하든지.

 

그 남정네는 아구찜을 핑계로 시도 때도 없이 들락거리며

그녀의 마음 깊은 곳에 추억을 덧칠하더니

또 하나의 전설을 남기고 홀연히 떠나갔다.

 

 

 

 

소주와 맏아들

 

어쩌다 들른 집에는 항상 그러하듯이

어머니는 앞집에 고추 꼬다리 따러 가시고

아버지 혼자 거실 바닥에 덩그러니 앉아 계신다.

방에는 텔레비전이 별 감흥도 없이 혼자 떠들고 있다.

날씨도 쌀쌀한 데 방에서 TV나 보시지 않고요.

의례건 한 말씀드리니

야매로 한 틀니가 먼저 입 밖으로 삐져나와

분답게 알은체를 하니

손으로 천천히 밀어 넣으시고,

사는 기 따악 지겹다!

힘들게 한 말씀 하시고

노년에 거의 유일한 벗인 참소주를 맥주잔에 손수 따라  

버얼컥 버얼컥 아주 정성껏 드신 후

시선이 소주병으로만 향하시고,

다소 위안이 되시는 듯 뒷말이 없으시다.

 

아버지께는 맏아들인 내가

마알간 소주 한 잔만도 못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어라 달리 드릴 말씀도 없고

시선을 따로 두기도 마땅찮아서  

나도 참소주 페트병만 뚫어지게 바라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