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시 '김해미 시인'


김해미 시인의 시 목련외 4편

김해미시인

본명 김경미
전남 신안 출생
월간문학세계신인상
공동시집고양이 골목외 다수

 

 

 

목련



허공에 암자 한 채
일생을 가도 닿을 수 없다
비구니 파아란 정수리인 듯
불 밝힌 동그란 연등
눈부신 경전을 필사하고 가는
흰 나비떼
독송하는 멧비둘기
아래 한나절쯤 앉으면
전생의 전생, 그 전생의 전생
무량한 죄업이 닦아질까
떨어져 내리는 해진 장삼
하산하셨는지
열반에 드셨는지
암자 무너진 터에
연두는 무성인데
나는 어느 암자로 가
흰 초 켜고
백등白燈을 달까


 

 

 

 

한여름 밤의 꿈



  나무에 걸린 매미 울음 모래시계에 가뒀습니다 그곳에선 부자가 천국에 가기보다 낙타가 바늘귀를 통과하는 게 쉽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하여 시간도 날렵한 허리를 지나려 머리를 들이밀어 보지만 탈출에 실패하고 맙니다 자궁을 빠져나오는 갓난애처럼 애쓰는 사이 하릴없이 지구의 중력장으로 떨어집니다 울음은 울음을 만나 짝짓기 하고 모래알만 한 알들을 따끈한 모래 무덤 속에 낳아 두었지요 그것들은 금세 부화했어요 공기를 접었다 펴 봅니다 삼단고음을 내질러도 진공의 고막은 이명에 지쳐 동그란 울음의 아라비아 숫자를 세고 있습니다 한 떨기 바람이 어루만지자 울음의 등에 날개가 돋아납니다 대상隊商의 행렬이 되어 차안此岸에서 피안彼岸으로 걸어갑니다 한여름 밤의 일이었습니다 소나기에 울음이 젖고 있었습니다
 

 

폐가

 


한때 사랑이라고 이름 붙인 것이 있었습니다만
모두 옛일이 되었습니다
우리 머물던 옛집
여름내 툇마루에 널어 말리던 매미 소리
어제 일인 듯 구슬 나무 귀에 대고 속삭이는데
당도하기 전 전갈傳喝은 날아올랐는지
귀먹으셨는지
쓸쓸한 흙담 무너진 살비듬 쓸어 올리면
하얀 민들레 홀씨 별자리처럼 피어났는지
당신은 아주 오시질 않고
녹슨 돌쩌귀 아래
백일홍 석 달 열흘을 붉었습니다

 





사모곡



악기를 연주하지 마세요
밤은 깊고 바람은 서늘한데
청동기시대 유물인 듯 반달 모양 돌칼로
달은 어둠 속으로 제 목숨 반을 거뒀는데
갯마을 소금꽃으로 피어난 내 어머니
하얀 뼈 구부러진 허리로 관을 삼고
창백한 머리카락 현을 삼아
녹슨 하모니카 조율되지 못한 쇳소리로
뼈 마디마디 뚫고 가는 파도 소리 높은데
어머니, 당신을 울리지 마세요
가을비 진양조장단으로 내리고 있습니다

 

 

 

우울한 계절



그해 가을에는 아픈 여인들 소식이 웃자란 채 무성했다
소문은 담을 넘었고
고층 아파트에서 투신했으며
SNS와 휴대전화 통화에서 전파돼
확대 재생산되었다
사람들이 입술을 열어
끊임없이 추가한 연유로
명단은 두루마리 휴지처럼 길어졌다
그녀들은 수술대 위에서
젖가슴의 한쪽이나 양쪽을 다 잘라냈지만
아마조네스의 후예는 아니었기에
허공에 신속하게 식염수 주머니를 채워 넣고 모성을 위장했다
수밀도 통조림을 집어 들고 돌아오는 발걸음이
균형이 맞지 않아 비틀거렸다
밤마다 가슴에서 바다 소리가 들렸다
밤의 안면을 난타하는 파도
손이 가슴을 누르면 목구멍에서 끅 두꺼비가 튀어나오고
하루에 한 번 소나기 무참하게 내려
달의 발등이 젖었다
달은 지구에 종속된 후
한 달에 한 번 젖가슴을 베어내고
매달 복원술을 실시했다
명단에 추가된 여자 눈에 초승달 번지고 있다
밤의 파편이 날카롭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