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자 시인의 시 꽃잔디 외 4편
현자시인
.「오늘의 문학」신인상(1995)
.「시와 표현」신인상(2013)으로 등단
. 충남 예술인 공로상(2004)
. 한국문인협회 홍성군지부장, 충남문협 이사,
. 홍주문학회장(8대) 역임
. 시집 「화요일 오후」
「그래도 풀씨를 날리며」
(현) 시와 표현, 홍주문학회, 충남문인협회 회원, 갈산중학교 교사
꽃잔디
어우러짐이야 참말 아름답구나
이렇게 도래 도래 모여 가슴을 열면
슬픔은 이제 더 이상 너의 것이 아니고
고통도 함께 지면 새털처럼 가벼워라
목마른 이 봄날
간밤에 한 줄금 단비가 꿈처럼 지나간 뒤
앞뜰 꽃잔디
꽃대궐 지어놓은 아침
어우러짐은 야, 뜨거운 불이로구나
오래 쓸쓸했던 어깨들 서로 안고 볼 부비며
삽시간에 꽃불 붙어 한덩어리로
활활 타오르는구나
황사 씻긴 투명한 하늘 아래
쪽박물 한 옹큼으로도 활짝 피어나는
욕심 없는 저 순박한 얼굴들이여
풀, 풀, 오월의 풀
가만히 보니, 일 년 열두 달이
오월의 힘으로 사는구나
흙내 나는 곳이라면
손톱 밑만 한 땅 어디라도
기어이 뿌리를 내리는 오월의 풀들아
오월의 풀방석 위에 앉아서
누가 절망하며, 누가 망설이며
누가 또 울겠느냐
오월은, 오월은
무조건 앞으로 가! 이다
오월의 늦은 땅거미 내리도록
머뭇머뭇 발 내딛지 못하는 그대여
밭고랑마다
끊긴 허리로도 일어서는 풀
한낮의 허기진 배로 천리千里를 걷는 풀
서로를 베지 않으며
어깨를 나란히 움쑥움쑥 차오르는
오월의 풀들에게 배울 일이다
배롱나무 꽃 아래서
사랑은 잠깐이고
추억은 석 삼 년이구나
아릿한 이름 잊었나 했더니
배롱나무 꽃 아래 서서
젖은 아궁이 불을 지피듯
또다시 마음이 달뜬다
긴 장맛비에
길은 끊기고
물 먹은 바람만 웅웅 수십 번
풀잎 눕히는 오후
그리움이 깊어지면 참말
병病이 되는구나
배롱나무 한 그루
온몸 발그레 열꽃이 핀다
낮달
하나 남은 주차라인에 빠듯이 차를 대고
숨 고르려 올려다 본 하늘
밤을 지샌 낮달 하나 희미하게 떠 있다
사는 일을 핑계로
어머니께 한 보름 뜸했던 사이
간병여사와 더 친해지신 쓸쓸한 어머니가
반쪽 얼굴로 가막가막
이 딸 얼굴을 짚어보고 계신다
담산리 파밭
언제보아도 오서산 슬하에 담산리淡山里
담산리淡山里는 무탈하더라
봄, 여름, 가을 없이 사철
파밭 하나는 무성하더라
열매 아니어도 알진 뿌리 아니어도
세상의 비린내는 내가 다 다스리리라
된서리에도 꿈쩍없는 시퍼런 쪽파 잎
젊음 하나 재산으로 믿고 일어서는
겁 없는 쪽파 밭은 아름답더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