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시 '김경식 시인'

김경식 시인의 시 폭포 외 4편

김경식 시인

충북 보은 출생

스토리문학(수필), 다시올문학() 신인상

다시올문학상, 부천예술공로상 수상

계간다시올문학주간

보은문학회, 부천문인협회. 전망 동인, 풍향계 동인

수상집 마음에 걸린 풍경 하나

시집 적막한 말

 

 

폭포瀑布

 

 

굴러야 해

 

무르팍 깨어지고 발목뼈 어그러져도

굴러야 해 상처가 아물면 더 큰 힘이 솟는 거야 자갈길이나 직각의 모서리,

한 길 넘는 바위도 굴러

굴러서 넘어야 해

 

지나치게 진지할 필요는 없어

한 번 지나치면 그뿐 다시 돌아올 수 없는 시간

거볍게 튀어 올라 몇 차례의 공중회전

고공 낙하의 공포 앞에서 최대한 뻔뻔스럽게

 

굴려야 해 오래된 전설과 흐르지 않는 절벽,

바위 위에서 낭떠러지를 굴리고 수직으로 떨어지던 절망의 흔적을 굴리고

대대로 유전하는 추락의 트라우마

날려버려야 해

 

바다에 닿으려면 본디

저의 빛깔로 천 년 만 년

시퍼렇게 살아 있으려면

두 눈 부릅뜨고

굴러야 해

 

굴려야 해

 

 

 

 

간월암看月庵 가는 길

 

달 보러 간다

물 나간 바다 건너

뵈지 않는 천만 겹의 파도를 넘어

한 걸음 더 가까이

달빛 속으로 간다

 

무량無量한 세월

가부좌跏趺坐 틀고 있는

나무 보살菩薩

법의法衣 낡은 자락 아래

꿇고 앉은 그림자들

 

세상일은 나 몰라라

비겁하게

비겁하게

그 속에 숨어

극락왕생極樂往生 빌고 있는

나를 잡으러 간다

 

이생 다시는 얼씬대지 못하게

멀고 먼 부처 꽁꽁

묶으러 간다

 

 

 

 

 

 

 

둑과 둑 사이 강물이 흐른다

한 쪽 둑이 무너지면 강은 이내 공간 밖으로 달아난다

 

그때와 이때 사이,

그때 혹은 이때를 지워 버린다면 시간은 일절 흐르지 않는 것이 된다

 

흐드러진 봄날

꽃 이파리 몇 장을 떼어 내자 홀연 그대가 사라져 버렸다

 

텅 빈 시간과 흐르지 않는 공간

 

애초 그대는 먼 전생의 그림자였거나 혹은 몇 억 광년 뒤에서 달려오는 도중일 것이다

 

먼 그대와 더 먼 그대 사이에 나는 서 있다

 

 

 

 

 

 

카페 포크웨이즈. 1

 

김포金浦의 논들은 날마다 한 마지기 제 허벅살을 도려서 도시의 바람에게 넘겨주었다. 웅덩이를 메우고 거푸집을 짓기 위해 산은 또 제 팔과 다리를 뚝뚝 분질렀다

 

거역할 수 없는 일이었다. 쉰 몇 해 깊이 박힌 뿌리를 끊고 그가 훌훌 떠났을 때도 나는 바람에 결박당한 채, 도시에서 건너온 불빛에 속살 허옇게 드러내 놓은 겨울 산을 망연히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가랑잎이 일제히 부르르 몸을 떨었다. 숲 어딘가에서 다시 한 그루의 나무가 스스로를 톱질하고 있을 것이다. 들 끝을 서성이던 해가 갑작스레 피를 토하기 시작했다

 

억새가 소스라쳐 서로의 어깨를 부둥켜안고 겨울새들은 여느 때처럼 논바닥으로 우수수 떨어져 내렸다. 익숙하게 길은 어둠 속으로 스며들었다

 

번번이 이렇게 그에게로 가는 길을 잃어버렸다. 어디로 흐르는지 어디에서 닻을 내리는지, 우리는 뿔뿔이 혼자 떠돌고 있었다

 

 

 

 

 

 

 

만행萬行

 

길은 꼭 한 발짝씩 앞서간다

 

그 끝은 어디일까 뒤를 따라나서면 이 골목 저 골목 날쌔게 달아나고 빠른 걸음으로 따라잡을라치면 훌쩍 풀숲으로 뛰어들어 종적을 감춘다.

 

잡목 숲의 무성한 가지를 헤치고 산길을 들어서면 길은 또 한 걸음 앞서서 하늘로 날아오르고

 

더 이상 달아날 곳이 없는 봉우리에 서면 산은 넌지시 처음으로 돌아가는 길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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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도 그 끝을 본 사람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