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시 '한이나 시인'

한이나 시인의 시 가장 무도회 외 4편

한이나 시인 약력

 

94  현대시학 작품발표로 활동 시작.  

시집  플로리안 카페에서 쓴 편지,

 유리자화상, 능엄경 밖으로 사흘 가출 3.  

한국시문학상서울 문예상 대상

내륙문학상한국꽃문학상, 2016 세종도서나눔 선정

 

 

 

 

가장무도회

 

                 

모두 초대받으셨군요

오늘의 드레스 코드는 마스크랍니다

흰색 검은색 파란색 꽃무늬,

잊지 못할 너와 나의 연결고리지요

외로움과 두려움의 얼굴을 가리고

저마다의 염려를 가리고

그래도 오늘밤은 춤을 추지 맙시다

아름다운 거리를 두고 멀찌감치 떨어져서

우리 눈빛으로 말을 해요

손을 잡지 않아도 마음만 주고받아요

벽의 거대한 괘종시계기 열두 번 종을 치더라도

검은 옷의 못 보던 사람이 시계 밑에 서 있어도

더는 불안해 말아요

삶과 죽음의 교차점에서 가슴을 쓸어내려도

검은 손길 피할 수 없다고

함부로 발설하지 말아요

 

슬픔은 더한 슬픔으로 맞서 이겨야죠

봄꽃처럼 막 피어날 희망의 꽃눈을 보세요

사랑을 하고 싶은 사람들만 모이는 가장무도회랍니다.

 

 

 

 

 

 

  파랑의 형식

 

                    

파랑은 바닷가에 두고 온 사랑의 형식이다

울트라마린에 0.1프로의 기쁨을 섞으면

가장 밝은 파랑이 되고

99.9프로의 우울을 섞으면

가장 어둔 파랑이 되었다

 

나는 해변의 길 잃은 구름

진한 슬픔 청색시대였다가

파랑을 찾아 꿈속까지 뒤지는 일

 

사랑하지 않으려고 애썼던 마음이다

 

세상이 온통 파랗게 보이는

산토리니의 둥근 지붕론강의 밤하늘

슬픔에 잠긴 성모마리아가 기도하는 모습의

저 파란 망토까지,

 

파랑의 기쁨과 우울을 딱 절반씩 섞어

파도마다 날려 보냈다

형식을 걷어내면 남는 것은 파랑 안의 흰색순결무구

 

 

 

 

 

 

내 안의 사막도시

                  

 

모래에 파묻힌 사막도시를 발굴하리라

꿈은 파르쵸처럼 바람에 펄럭이고

대상들 행렬 지나간 자리

쌍봉낙타를 타고

적막을 데리고 터벅터벅

서역 저 너머 먼 나라로 가리라 

마음을 한 짐 고비의 모래밭에 부려놓고

빈 껍질 가뿐한 몸으로 길을 떠나리라

십 년에 한 번 비가 오는 나라

호수가 사라져 양파꽃처럼 하얗게 시들어버린 나라

몇 천 년 전 누란을 찾으러 

모래폭풍 속 아직도 속눈썹 긴 마흔 살 그녀

변치 않는 사랑을 만나러.  

 

 

 

 

두려움의 매혹

                                    

주황색은 치명적이다

주황색은 두려움의 매혹이다

길 위에서 만난

절벽에 세워진 사원이다

생애의 가장 눈부신 하루를 뽑아낸 색깔

못 하나 박은 일없이

나무기둥으로 지어진 영혼의 절 한 채다

주황색은 마당에 올린 허공의 꽃

상처를 빼닮은 능소화다

혼자 불타다가 목을 꺾은 슬픔이다

 

리오의 아름다움에 흠뻑 빠진

빵산의 핏빛 노을주황색,

채워도 채워도 배고픈 허기며 갈증이다

접어둔 사랑죽기 전에 고백하고 싶은

눈물 나는 용기다  

 

깜깜한 나락,

치명을 묻힌 독화살이다

너는  

 

 

 

 

 

흰 그림자

                             

                     

겨울 자작나무 숲은 집필실이다

감았던 눈 번쩍 뜨게 하는 흰 그림자

나무 한 그루가 한 문장이다

수백 그루의 문장을 잇대어 썼다가 또 지우며

백지 속으로 가는 길

 

나무 껍데기 종잇장에 새기는 영혼의 글자들이다

 

우랄산맥 오지로 숨어든 유리 지바고,

눈보라 치는 설원에서 눈꽃 속으로

가뭇없이 사라지던 이별 마차다

라라를 사랑하지 않으려고 애썼던

혁명가의 차가운 열정,

서른다섯에 죽은 유리 지바고의 흰 그림자다

 

겨울 숲속 자작나무로 가는 길은 라라의 울음소리에 닿아 있다

 

자작나무는 그 사랑의 혹한을 한 겹 새하얀 껍질로 버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