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시'한영채 시인'

한영채 시인의 푸른 잎을 엿보다 외 4편

 

 

 

한영채 약력

* 경주 출생

* 2006<<문학예술>> 등단

* 시집 모량시편』 『신화마을』 『골목 안 문장들

 

 

 

 

 

 

 

 

푸른 잎을 엿보다

 

귀를 열자 소리 전쟁이다

와르르 공기 알맹이 모래톱으로 쌓인다

가을로 가는 밤 오롯이 그와 대치 

허리 구부려 혈맥을 찾는

 

마당 구석 남천 이파리에 숨었다가

긴 발목으로 물 위를 걷다가 세수 마친 여자의 종아릴 훔친다

빵빵해진 뱃가죽을 두드리는 하루

그의 하루는 벽돌에 기댄

구월 꽃무릇 같은

 

침대 오른 남자의 얼굴을 갈기다 붉게 솟구친 북쪽 벽

순간의 꽃 절창으로 피어나고

푸른 이파리 사이 엿보다

거미가 엮어둔 그물에 긴 발목이 잡히기도 하는

 

어둠이 좋다 새벽이 닫기 전

긴 빨대로 목을 누른 여자의 붉은 소리가

다섯 번의 자명종으로 울리고

모래알처럼 소리는 왱왱 구르고

 

눈동자는 붉다

 

 

속도의 경계

 

얼룩무늬 정지선 검은 타이어가 휙 지나간다 출근길

이차선 밖으로 속도를 줄인 흰 소나타,

골 깊은 평리 금계국을 여는 검은 그림자

 

소리 멈춘 하지夏至, 흰 개망초 만발한 칠월

길가 커튼을 친 리무진,

고요가 가득하다

 

여름이 열리고 자궁이 열리고 창이 열리고 천국 계단이 내려오고

곡소리 올라가는 주둥이 긴 검은 리무진 간다

흰 눈썹 날리며 천국으로 간다, 간다

 

구름 같은 간곡한 그 무엇,

사리처럼 남겼는지

가슴이 아직도 채 열리지 않은 세계에서 난,

 

속도를 늦춘다 생의 마지막 선율이

축제처럼 흐르는 아침

 

 

드므가 사는 집

 

오월 꽃그늘이

포록포록 달포 된 강아지를 재운다

처마 밑 펑퍼짐하게 눌러앉은 독,

옹이진 가슴 불길 잡으려

맑은 물 고집하고 있다

돌계단을 오르자 사랑채 모퉁이 느티나무 옹이,

오도카니 이파리에 쌓여 익숙하다

태풍에 부러진 가지들

고물고물 육 남매 바람 잘 날 없던 곳

할머니 관절염 앓기 전부터

초록은 그늘을 앉는다

혼기 지난 시누이의 신열 같은

골똘함이 옹이진 채

개울물 소리 안으로 흐르는

촉수 세운 새싹들

할아버지 손길은 느리게 수평을 일군다

드므 앞 앉은뱅이 나무의자가

둥근 독 속에 비친 그의 파랑을 기억한다

느티 아래 무순을 뽑아

새댁 입덧 맞추느라 분주한 오후

구름 한 자락 줄장미 담장을 걷다

드므를 다녀간다

오래된 물거울이 훤하다

 

드므엔 노부부가 산다

 

 

 

거풍擧風

 

수장고가 열렸다

어느 가문에서 온 오래된 글자들

박물관 그늘에서 숨 쉰다

먼지를 털어 말리자

구겨진 문장들이 내밀하게 등을 편다

냄새는 소유권을 따라 나선다

검은 시간의 장, 넘기다가

고문서 앞에서 아버지를 만난다

이월 초이레 새벽 네 시

문풍지 울리며 떨리던 목소리,

밭고랑 매던 누이의 필사본이 시조창으로 나오고

골짜기를 다녀간 묵객 시가

시냇물처럼 흐르고

한 해 새경 장부가 모은 밀알로 심어진 점,

점들이 모여 덧바른 두께 만큼 묵책을 만들고

나무 기둥에 열매가 열리고

사람들의 이야기가 크나큰 풍경일 거라는

곰방대를 문 아버지가 걸어 나오시고

묵향 깊은 시골 장방 냄새가

아버지의 손길처럼 들락거리는

수장고 열리는 날

어느 듯 박물관 뜰에 묵화처럼 걸리고,

 

 

 

그녀가 해독하는 시간


아침을 점검 중이야
수화 문자로 해독하는 그녀의 심장
이층 수족관 과학 감성돔
그녀는 푸른 치마를 입고 산다
계절과 무관한 그런 치마
그녀를 알려면 비밀번호가 필요한 거야
여기가 바다인지 강인지
맛도 냄새도 없는 이곳
겨드랑이에 불을 켠다
다물어 지지 않은 입
붉은 콧등은 길을 안내하는 등대
그녀의 심장은 가면처럼 견고해
울려 퍼지는 아이들 소리가 가끔 들리기도 하니?
꼬리를 흔들면 같은 동작이야
공기방울을 보내지 않아
먹지 않아도 배고프지 않은 나날
관심을 보이면 꼬리를 힘차게 흔들고 싶어
먹잇감이 없어도 난 괜찮아
파도가 없어 잠든 시간이야
나무가 흔들리지 않아 미동 없는 치맛자락
죽어가는 그림자는 노을이 지는 시간
아가미가 붉지만 사유란 없어요
물의 힘은 고요로 잠들고
온도는 알 수 없는 물의 감정
수평 지느러미로 막다른 사각지대
와글와글 소리는 나의 희망이야
언젠가 비 오는 날
치맛자락을 조이며
꿈꾸는 동해로 푸르게 나아 갈
등푸른 물고기 로봇