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시 '황경식 시인'

시도詩盜가 다녀갔다 외 4편

 

[이름] 황경식
[약력] 경북 의성 출생
        1994년 1월『현대시학』으로 등단
        2001년 10월 시집 『실은, 누드가 된 유리컵』 (문학세계사)

 

 

 

 


1.시도詩盜가 다녀갔다 
                            황경식
 
어느 누가 소개한 인연일까
우리가 그렇게 만난 것은
 
낯선 몽유夢遊 한가운데서
제 정체를 문득 묻는 것처럼
 
시도詩盜가 가만, 다녀갔다
 
속속들이 시로 물든 
젖은 손바닥을 문지르며
훔치는 것이 아니라
무얼 떨어뜨린 것이다
 
사방으로 활짝 열린 문 앞에서
발끝에 반짝, 걸리는 것이 있었다  
 
 

 

 
2.천문을 읽다
                                        황경식
 
마침내, 모든 말말과 물물을 끊어버렸다
TV나 인터넷도 수신 차단
 
저쪽, 하늘나라로 눈을 돌린 것이다
 
퍼렇게, 묵묵 얼어붙은 무심한 얼굴이여
속속들이 배꼽까지 다 드러내놓고
어쩌면 미리 지켜보고 있었는지도
 
두근거리는 물음이 끝없이 이어지고
금이 간 천상열차분야지도가 깨어지며
숨겨둔 여러 별이 우르르, 쏟아질 것 같아
고개가 아주 빠지도록 여백을 펼쳐들었다

 

 


3.채식주의자  
                                     황경식 
 
귀신이 풀 뜯어 먹는 소리를 들었다
 
채식주의자 같았다
지나가는 쥐나 고양이를 
거들떠보지 않았고
 
사람들도 그대로 보냈고
마른 풀만 미련하게 고집했다
 
몽고식 햇볕이 그의 여윈 등에 쏟아졌다
일생을 헛산 것 같았는데
우체국 택배처럼 배달된 쓸쓸한 노래
되새김질 없이 가만, 넘기고 있었다

 

 


4.엔딩 
                                      황경식 
 
밤새, 그 여름 사냥꾼을 따라다녔지만
머리는 고사하고
 
여름의 꼬리도 잡을 수 없었다
여름 호수도, 여름 별자리도 놓쳤다
 
종아리 가득 찰진 통증과 알이 배었고
사지는 탱탱한 술법에 묶였는데
 
잘못 부어 말린 시멘트기둥처럼
사방으로 잔금이 내리 그어지며
구겨진 군마음*이 덧없이 새어나갔다
구석구석 몸이 뻣뻣해지고
남의 살을 만지는 것 같았는데
 
엔딩을 빼먹은 듯 꿈은 계속되었다
 
 
*군마음: 잡생각
 

 

 

5.햄버거와 시
                                                                       황경식
 
서러운 일생이 한 장의 패티로 저며 나온다. 고단한 꿈이 흐린 눈물
처럼 육즙으로 흘렀다. 튀어나온 입술도 여윈 발가락도 함께 으깨어
진다. 낯선 시구詩句에 사로잡혔던 귀는 어디로 갔을까. 속속들이
멍든 말들이 모차렐라처럼 녹아내린다. 더 이상 배를 내밀 수 없는
침묵의 끝. 히얀 양파조각들이 떨어지고 살 속 깊이 검게 탄 자국이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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