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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시 '이수풀 시인'나무들의 식탁 외 9편
복지TV청주방송 | 승인 2020.01.07 12:39

약력

 

 

2006년 <현대시학> 신인상으로 등단. (사)한국작가회의 양주지부장 역임.

현재 고둥학교에서 상담교사로 활동.

 

 

 

 

 

 

 

1.나무들의 식탁 

                                                     이수풀

순하디 순한 것들아
한결같이 눈망울 고운 것들아
네 발 혹은 두 발 달린 송곳니가 있는
뭘 몰라 짹짹거리거나 으르렁거리는 것들아
이 땅의 주인은 심장을 빨갛게 숨기고
돌아다니는 것들이 아니다
새나 물고기 뱀
너구리나 호랑이 멧돼지 너와 나는
나무가 자신의 울타리 안에 방목해 기르는 
가축일 뿐이다
잊어서는 안 된다
한순간도 쉬지 않고 벌떡거리며 뛰어다니며
소리 지르며 게걸스럽게 먹고는
양분 만들어 나무에게 평생 바치고 있다는 사실을
숨 가쁘게 사랑하고 번성하고 방황하다
암투를 벌이다 지쳐 쓰러져 땅에 묻히면
나무의 일용할 식사가 된다는 사실을
먹다 남은 머리나 내장
발톱이나 머리카락은
햇볕과 바람 흙과 물을 섞어
몇 번 주물럭거려 나무는
자신의 몸에 꽃으로 매어단다
이 모든 음모를
싱그럽게 초록 잎사귀로 위장한
더 사악하고
더 생명력 지독한 계략이 많은 나무는
어줍잖은 얼룩무늬 총으로 무장한 것들이
함부로 범접할 수 없는
일곱 번째 빙하기가 들이닥쳐도 끄떡없을 
무지막지한 포식자
끝없이 너그러운 초록 표정의 막후세력이다
이 땅에 맨 먼저 나타나
나중까지 있을 만큼
덩치 크고 오래 사는
식성이 까다롭고 단순한 나무는
이제 곧 식단을 바꿀지 모른다

 

 

2.새는 죽는다 

                                                             이수풀

허공에 네 귀퉁이를 물고 다니던 
허공을 뒤집을 수도 마구 구길 수도 있던 
허공을 휘저어 소용돌이치게 할 수 있던 
허공을 잘게 부숴 깃털 사이에 넣고 다니다 낭랑한 울음으로 세상에 던져주던 

활공이다 저공 획획 빌딩 사이를 고공 질주하던 
까마득한 점 하나로  높이 올라 천막을 쳐주던
허공의 이 끝과 저 끝을 쥐고 있던 
허공을 관통하던 갖고 놀던 새가 
허공을 흉내 낸 유리창에 부딪혀 죽었다 

한 방울의 피로  대지를 적시고 
새는 새답게 바닥으로 떨어지는 순간 죽었다 그 순간은 멀어
한 생애가 지나가고 식구들의 얼굴이 지나가고
하지 못한 말이 생각났으리라
-허공아 날 살려라 
얼마나 허공을 불렀는지 눈꺼풀과 부리는 열려져있고 
매부리 진 열개의 발톱은 후벼 파이도록 허공을 움켜쥐고 있다

새는 죽어서도 한줌 허공에 매달려있다
허공에 살던 새가 허공에 부딪쳐 죽었다 

우물은 우물에 빠져 죽고 
장미는 장미에 취해  죽고 
펜은 펜에 찔려 죽고
  
내가 죽었다면 그건 나 때문일 것이다 

 

 

 

 


3.나비 
                                                             이수풀

나비가 죽어 땅바닥에 떨어져 있다 

검정 정장 차림의 개미들이 몰려와

주검을 한 조각씩 떼 메고 어딘가로 갔다

날개는 두고 갔다

이 하늘에서 저 하늘로 건너뛰던

 

 

 

4.빨강과 파랑 사이에서 생긴 일

                                                     이수풀

빨강이 식으면 우울해지면
병이 나면 두들겨 맞아 멍들면 보라가 될까
파랑이 뜨거워지면 신명이 나면
변심하여 들뜨면 바빠지면 보라가 될까
빨강과 파랑 사이 열정과 냉정 사이
왔다 갔다를 반복하며 생각해본다

보라는 빨강이 될까 파랑이 될까 망설이고 있는
엉거주춤 어정쩡 애매모호한 자기 자신에 확신이 없는
자신에 빠져 자신의 바깥으로 나오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깊은 산속 청보라 짙은 저 산수국 꽃바람에 날려 
계곡물에 떠내려가든지 진달래로 피든지
사랑이 확 타오르든지 꺼지든지 울든지 웃든지
보라는 언젠가 보라를 빠져나와
빨강이나 파랑으로 달려갈 것이다
진지하고 유쾌한 걸음걸이로

 

 

 

5.구름과의 대화

                                                             이수풀

저 구름 속 물방울들은 말한다는데
너는 누구의 속을 헤집고 흘러 다니다 이곳에 왔니
맘씨 좋은 떡갈나무니 귀여운 노루귀꽃이니
부엉이의 빨간 밤, 끝없이 깜깜하다는 사람 속이니
아니면 그냥 얼싸절싸 흘러 흘렀니
그 무섭다는 눈물 나라 바다에는 가보았니
그곳에 가면 바다표범 바다사자 바다코브라에게 
몸을 뜯겨 먹혔다는데
아래에서 위로 위에서 아래로 좌충우돌 뒤섞이고 
뒤집히고 솟구치다 가라앉기를 수만 번 해야 한다는데
이때 머리칼은 죄다 뽑히고 심장은 백 개나 되어 발딱거리고
발이 어디 붙어있는지 모른다는데
어지럽다 못해 너와 나 구분은 사라지고 
소금물 되어 눈물바다 된다는데
물이라면 바다를 통과해야 비로소 물이 된다는데
혹은 계곡에서 혹은 강에서 들판에서 사막에서 뜨거워서
대지를 거부하고 형태를 바꿔 날개를 달고 줄행랑친 아니
먼저 올라간 친구들이 손 내밀어 잡아끌어줬다는데
물방울들이 날개를 달고 모자구름 양말구름 구두구름으로
모양 바꿔 숨어보지만 날개란 무거운 것
제 무게 감당할 수 없는 것이라는데
물방울들이 눈망울 굴리며 아래를 굽어보며
이번에는 어디로 아무 데도 아닌 곳 그 어딘가로
아프리카 숲으로 지중해로 마다가스카르 섬으로
강원도의 심장 속으로 뛰어내릴까
서로 묻고 궁리 중이라는데
이때쯤이면 여지없이 깃발 흔들며 평등을 외치며 
바람이 구름 한 무더기 바다 쪽으로 몰고 간다는데

 

 

 


6.오늘을 파는 서점은 없나요?

                                                             이수풀
오늘을 잃어버렸다
어떤 일의 징조인가 숨바꼭질인가
많은 날과 사건 숟가락들 중 왜 하필 꼭

오늘을 대문 밖으로 들고 나간 일 없다
물론 집은 무너지지 않았고 날씨는 쾌청, 
두 개의 앞니는 화목하고
아이들은 둥근 공기 속으로 손 장난치며 들어간다
분명 집안에 있다 그러나 없다
장롱이나 서랍 구겨진 침대 시트 깨진 어항이나
탁자 위아래 안에도 밖에도 없다
온갖 잡동사니 먼지 뒤집어쓰고 있는
책장에도 꽂혀있지 않다
태양이 도끼 눈 뜨고 내려다보는 벌건 대낮
오늘은 어떻게 촘촘한 내 손아귀에서 빠져나갔을까
이건 반칙이다 혹시 뱀인가 메뚜기 날짜인가
날 찾아봐라 숨었다 깊이 잠든 금고 속 현금인가
시간 맞춰 놓고 기다리면 구워진 빵처럼 잘 익었을까
오늘은 내 곁으로 잘 찾아올까
분실물센터에 전화라도?
어느 허름한 헌책방에 기대 서 있을까
절판되기 전 오늘을 구입해야 한다
자정이 되기 전 반납해야 내일을 대출받을 수 있다

값이 구천 원이란 얘기를 들은 적이 있다
오늘을 파는 서점은 어디 없나요?

 

 

 

 

7.호랑이 발자국에서는 국화꽃 향기가 난다
                                                             이수풀

동해안 지역 연해주 밀림에서 느닷없이 만난 
폭설 위에 찍힌 호랑이 발자국
꽃이다
영락없는 순백의 국화꽃이다
그 꽃, 길을 가르쳐 주겠다는 건지
어디 한번 따라와 보라는 건지 
볕 바른 구릉 쪽을 향하여 한 줄로 
자욱 자욱 이어져 있다 

싱싱하도록 박혀있는 선명한 한 송이 한 송이 주워들고 
발자국은 거짓말을 하지 않지 
호랑이는 필시 아름다운 짐승인 게야  
노래 부르며 뒤따라가면 휙휙 산맥을 타고 넘어 내지르다 
쩡쩡 금이 갈수록 얼음이 두꺼워지면 
겨울 강을 건너면 백두산에 당도하면   

거기 국화꽃을 뿌리고 다니는 호랑이가 사는 나라 
작은 만병초가  큰 이깔나무에 기대어 살 부비며 살고 
그 이깔나무 아래 우는 토끼 다람쥐 멧돼지 
살가운 숨결로 하나가 여럿이 
여럿이 하나로 함께 벙그는 꽃의 근원지, 
삼천리가 평화롭게 펼쳐져 있으리라

대설주의보 눈보라 속 시린 발 구르며
나의 살던 고향이 어흥 꽃피는 산골로 
봄 마중 가고 있다

 

 

 


8.빈 손
                                                             이수풀
쥐었다 폈다가 생의 전부인
말미잘이나 해파리 같은
자포동물 두 마리
이것들 처음에는 바다를 움켜쥐었다 놓았다
바다를 떠난 다음엔 풀밭 속에서 바람을 조였다 풀었다
배가 고프자 나무에 엉켜 붙어
주먹만큼 한 몸의 전신을 뭉텅뭉텅 폈다 오므렸다
빨간 꽃들 흉내 내는 것들 용서할 수 없다 욕설을 퍼부었다
다시 바람 속을 떠다니다 바위처럼 의뭉스럽고
구름처럼 헤살치는 내게로 왔다
기다란 양팔 끝에 붙어 살게 되었다

수시로 흩으렸다 모았다
밀쳤다 당겼다 열었다 닫았다 하지만
아무것도 거머쥐고 있지 않은
나와는 종이 다른
늘 비어있는 손 두 마리
잡을 것이 없으면 기우뚱거리는 허공이라도 물었다 뱉어주며
나를 부양한다 아니 내가 빌붙어 살고 있다
지금 여기,
열 개의 손가락만큼 자유롭게
호랑이 앞에서도
맘껏 활짝

그림자 둘둘 말아 챙겨들고 떠나는 날
동해 푸른 물 찾아가 빈 손 두 마리
풀어놔주고 가야하리

이것들 만약 내게 오지 않았다면 쉿!
(일찍이 잎사귀는 나무를 일으켜 세웠고 손은 나를 지구에 매달아 놓았지)

 

 

 

 

9.침묵은 울지 않는다
                                                             이수풀

침묵을 시장에서 사다 기른다. 털이 하얀, 흰 구름이라 부른다. 귀가 길고 눈이 동그란 푸른 잎사귀를 좋아하는 꼬리 짧은 침묵, 아카시 잎을 순식간에 먹어치우며 침묵은 날마다 커간다. 왕성한 식욕만큼이나 등이 휘도록 흘리고 다니는 똥, 까만, 넘치는 언어인가, 똥을 보면 들린다. “질퍽한 사랑에 빠졌어요, 딱딱한 그리움. 배춧잎을 넣어주세요. 울지 않는 침묵은 앞니가 길다. 밤새 나무토막을 갉는다. 쌓이는 소음을 수시로 쓰레기통에 털어내지만 퀴퀴한 냄새가 난다. 집안이 침묵으로 시끄럽다. 

 

 

 

 

10.욕실에서
                                                             이수풀


스위치          이 판에서는 눈치가
                빨라야 해

전구            나보다 너의 눈짓에 쿵짝을 빠르게 맞추는 녀석 있으면 나와 보라                  고 해, 오늘은 해가 몇 번 뜰까

샤워기          해 뜨지 않든지 백 번 뜨든지
                구름은 소나기를 쏟아지게 할 수 있어

수건            너는 목이 긴 게 병이야
                코브라 같아 무서워

샤워기          부드럽게 씻어주기 위해서는
                연꽃을 닮아야 하거든
                그래 연밥에서 얼굴을 빌려 왔어

물              다들 이뻐

변기            게걸스럽게 먹고
                함부로 트림하던 나도

거울            미안해 방금 전 눈 크게 뜨고 본 것도
                얘기해 줄 수 없어
                심한 기억 상실증을 앓고 있나봐
                만약 너희에게 안 좋은 일이 생겨도
                현장에 있었을 뿐
                알리바이를 대 줄 수 없어

비누            그건 마찬가지야
                내 안에는 웃음 줄기세포가 많아 하지만
                딱딱하게 굳어있어

물              너를 도와줄게
                네가 웃을 때 세상이 깨끗해져
                풍부한 상상력의 소유자
                웃음으로 때를 벗기는 너는
                잠재력이 많은 개그맨이야

온수와 냉수     우리가 너무 다르다고
                피는 같은데 사랑의 깊이가 달라서 그래
                이해해 줘

수도꼭지        너희가 함께 있을 때 맘이 편해
             
치약            언제나 혼자인 걸

통풍구          바람이 불고 있는 한
                혼자인 것은 없어
                머리카락 말해봐

머리카락        하수구가 불러
                도와 줄 일이 생겼나봐
                이따 봐

플라스틱 조화   이곳은 특별한 공간이야
                내가 뿌리 내릴 수 있는
                생화보다 싱싱하게

욕조            요즘은 이쁘다는 표현을
                조화같이 이쁘다고 해

플라스틱 조화   입만 무지무지 크다 생각했는데
                너는 바다야

거울            너희들이 있는 한
                많은 아이들을 낳을 수 있어

수건걸이        아이들의 체력 단련을 위하여
                철봉으로 이 한 몸 바칠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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