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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시 ‘강봉덕 시인’그 여자, 마네킹 외 9편
복지TV청주방송 | 승인 2019.12.03 10:16

〔이름〕강봉덕

〔약력〕 1969년 경북 상주에서 출생했다. 
2006년 《머니투데이》 경제신춘문예로 등단, 
2013년 《전북도민일보》 신춘문예 당선, 
2012년 계간 《동리목월》에 당선했다. 
시집 <화분사이의 식사>를 썼다.

 

 

 

 

 

 

 

 

 

1. 그 여자, 마네킹 

                                               강봉덕

때론, 패션도 종교가 된다
묵언 수행하는 그 여자
침묵으로 한 종파를 완성시킨다
그 종파의 교리는 계절을 앞질러 가는 것
한 계절 똑같은 웃음이나 빛깔
표정을 만드는 것이다
새로운 계절에 이르기 전 
그 여자의 설법은 고요하고 은밀하다
이 거리에 들어온 사람들은 주술에 걸리듯
그 여자의 짝퉁이 되기 시작한다
포교는 항상 중심에서 변방으로 퍼진다
짧은 치마처럼 간단명료한 표정
미끈한 팔다리로 사람들을 전염시키며
파격적인 노출도 교리가 된다
패션이 변할 때마다 
사람들은 새로운 표정을 만들며 순종적으로 바뀐다
경기 불황이 몰려오면
그녀는 더 화려하고 빠르게 변신한다
사라진 추종자를 다시 불러들인다는 것은
침침한 눈으로 바늘귀에 실 꿰듯 힘겨운 일이지만
손바닥 뒤집듯 가벼울 수 있다는 듯
투명한 벽 앞으로 모여드는 사람들 
그 여자, 화려한 변신을 시작한다

 

2. 블랙홀2   
-아파트

                                        강봉덕

아름다운 감옥을 만들기로 하자
비밀번홀 바꾸고 손잡일 없애기
완전한 공간은 분리된 곳
3동 310호는 수형번호라 기억하자
영어 이름은 미래어로 번역하기
기억의 블랙홀은 벗어날 수 없는 곳
감시카메라로 조정되는 시간
방문자는 정기적인 택배기사다 
수천 년 후 박물관으로 불려도 좋은 곳
한 가족 감옥이나 무덤으로 기록되거나
고장 난 비행접시라 믿도록 하자
사람들은 수형자를 위한 가설을 만든다
어쩌다 독거노인의 뼈를 만나면 무기수라 부르자
안으로만 열리는 문은 미로 같아
한 번 갇힌 수형자는 나올 수 없는 곳
완벽하게 보호되는 안전한 곳
시간은 뒤로 흐른다, 늙은이에서 아이로
기억은 점점 작아져 흐릿해지고
사각의 블랙홀 같은 공간은 
수형자를 어둠으로 당긴다

 

 

3. 복산 유곽
                                              강봉덕 
 
골목이 시끌벅적하다
여우 가죽을 뒤집어 쓴 여편네의 악다구니
사방으로 날아 여린 꽃 목이 꺾인다
초경을 하는지 시뻘겋다
꽃받침처럼 탬버린 흔들던 소녀
산비탈 사글세로 내려앉은 들꽃이다
단맛을 빨아먹는 악어가죽 두른 그들 
잡식성 들짐승이다
밤의 꽃은 어두운 골목으로 자란다
골목은 늘 축제 중이다
목에 둘린 밍크, 구두 굽으로 내려앉은 소
곰 너구리 토끼 양 입장한다
네온사인 밑으로 들어간다
모두가 내통한다
몸짓으로 통하고 손끝으로 섞이는 곳
들짐승이 가축으로 뛰어놀고 꽃들이 자지러지는 곳
여기가 당신이 그리던 에덴일까
골목길이 안개로 흥건하다
넘실대는 악취, 햇볕 몸 섞는다
손톱자국 선명한 길바닥엔
모난 돌과 몽치 씹다버린 껌 
그리고 풀꽃,
아스라한 세계를 밀어 올린다
천국의 거리엔 여전히 아침은 멀다

 

4. 고양이가 골목을 읽다

                                                     강봉덕
 
담장 위, 어둠처럼 천천히 밀려와
난간에 쪼그려 앉아 두꺼운 골목을 읽는다
골목은 어둠을 한 겹씩 쌓으며 자서전을 엮는다

두 손에 침 바르며 곰곰이 책을 읽는다
잔업을 마치고 돌아오는 땀 절은 작업복을 읽는다
거북이 등짝 같은 학생이 넘어지고
대리운전 차량이 황급히 떠나고
껌을 찍찍 씹는 하이힐이 어둠 속으로 들어간다 
발라진 생선같이 흐릿해지는 날이면
집나간 발자국이 불 켜진 방을 들여다보곤 한다
가끔 욕지거리 같은 찌그러진 냄비가 날아오는 것은
문간방 일용직 김씨가 독서를 방해하는 것이다
어둠을 배경으로 책이 한 뼘씩 자라면
그는 둥근 수염을 펼쳐 하루의 깊이를 가늠한다
어두워도 맑은 문장을 만날 수 있다는 듯 
매일 밤 혀로 어둠을 닦는다
긴 하품을 하며 꼬리 같은 부록을 읽을 즈음
눈 밝은 청소부는 먹다 남긴 간식을 수거해 가고
눈 어두운 하나님은 책을 읽기 위해
둥근 램프를 골목에 걸어 둔다
 
 

5. 수몰지구
  
                                                                                                        강봉덕
  
붉은 상처가 아물지 않은 땅의 문을 빈틈없이 꽉 막고 있는 마개는 잔잔하다 손잡이도 자물쇠도 없어 어느 누구도 열어보지 못한다 투명한 표면은 언제나 적막만 돌린다 들여다보는 얼굴만 되돌려 보내며 갇혀 있는 것들의 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가뭄을 틈타 가끔 마개가 열리면 쩍쩍 갈라진 진실은 허물어져 흔적만 보인다 바닥까지 말라붙은 몸은 감춰야 빛나는 냄새를 햇볕에 말린다 갈라도 갈라도 갈라지지 않고 점점 단단해진 마개는 무엇이든 감추는 힘이 있다 감추고 싶은 일을 수면 아래 묻고 오랫동안 갇히면 더 향기롭다고 입맛을 부추기는 사람들, 잔잔한 마개가 첨벙 소리를 지르는 동안 누군가는 쏟을 수 없는 비린 내장을 손쉽게 포장하는 법을 익힌다 

수면 아래서 문을 여는 일은 허공의 고리를 찾는 일, 둥근 파장을 만드는 마개는 열리고 싶지만 비밀을 숨기려는 본능이 있다 

 

 

6. 감은사 
                                              강봉덕

팽팽한 허공이 균형을 잡고 있다
늘 마주 보고 서 있는 
그들은 맞수다
쉽사리 다가서지도 물러나지도 않는다 
중심이 흔들리지 않는 저 근성
쓰러지지 않는 비결은 마주 보고 있기 때문
서로 무너지지 않으려 안간힘 쓴다
대웅전 앞, 사각의 뜰
먼지나 흙이 되어 모두 돌아간 시간 
아직 버티고 있는 저 힘
눈동자는 당신의 허점을 살핀다
쓰러지는 일이 무서운 것이 아니라 다시
일어서지 못하는 일이 무서운 것
가까이 있다 멀리가면 맞수가 아니다  
일상의 기울기가 그림자를 만드는 시간
이유도 모른 채 중심에서 떠나간 사람들
죽죽 금 간 모습으로 감은사 탑 주위를 돌고 있다
 

 


7. 금요일의 꼬리들

                                                                                                         강봉덕
 
금요일의 꼬리는 길어? 꼬리가 꼬릴 만들어, 다음 날도 그 다음 날도. 불금이 길어지니 좋지? 불타는 굴뚝도 좋아? 헤비메탈처럼 재생되는 밤, 기계음은 더 빨리 돌아 컨베이어 곁 안전화는 먼질 두드리며 화음을 맞추지 금요일의 음은 검은색, 음계를 올려 건반을 두드려 소리가 소리의 꽁무닐 빠져나오지 빠르게 불사르는 금요일은 맛있지 금요일을 잘 넘기려 구워 먹고 고아 먹는 맛, 이어지는 잔업 뒤의 고래 심줄 같은 맛, 지겨운 맛, 꼬리를 당겨 머리에 붙여줄까 둥근 요일은 구름처럼 가벼워 거리는 꼬리로 넘치고 뭉텅뭉텅 빠져나온 하늘은 길지 음계보다 높게 다리를 붙여줄까 신발 끈 묶고 바닥 치며 그리고 달려 볼래 지친 다린 새벽을 기다리지 내리막은 가속도로 오르막은 탄성으로 몸통보다 꼬리가 크다고? 잘려도 살아나는 아름다운 불멸의 꼬리, 꼬릴 치고 꼬릴 숨기며 뚜껑이 덮어야 꺼지는 금요일의 맛

 

 

8. 빙판을 건너가다

                                                                                                          강봉덕
 
칼날 같은 속도로 건너간다 후다닥 건너간다 생각 없이 건너간다 건너가고 건너간 빙판이 핑글핑글 매끄럽다 한파가 지나가다 걸린다 바람이 자나가다 걸린다 폭설이 지나가다 걸린다 중국산 정체불명의 언어가 매끌매끌 빙판이다 일수쟁이 뒤통수로 반짝인다 발설하는 손톱으로 반짝인다 살금살금 건너가다 넘어진다 엉금엉금 건너가다 넘어진다 곁눈질하다 넘어진다 사회초년생이 엉덩방아를 찧는다 미니스커트가 엉덩방아를 찧는다 미성년자가 엉덩방아를 찧는다 잡아주던 발이 헛디딘다 일어나다 넘어진다 빙판이 덥석 문다 빙판이 엉덩이를 먹는다 빙판은 넘어지면 먹는다 현금입금기의 입으로 냉큼냉큼 받아먹는다 유부녀를 받아먹는다 뾰족구두를 받아먹는다 한파를 받아먹는다 초보를 받아먹는다 가난을 먹는다 빙판이 넘쳐난다 길거리에 생겼다가 전화기로 옮겼다가 인터넷에 붙는다 빙판이 자란다 구멍만 하다가 구멍이 자라서 빙판 안에 빙판 밖에 빙판, 빙판이 넘친다

 

 


9. 꿈은 붉은빛이다

                                            강봉덕 
 
꿈과 붉은빛은 근친이다 
절실한 꿈일수록 붉은빛에 가깝다
태초 하늘이 처음 눈 떴다, 감을 때
온통 붉은빛으로 물든 세상
붉게 물든다는 건 꿈을 키운다는 것이다
길은 몸을 열려고 붉은빛 허공에 걸어 둔다
지구를 향해 끝없이 추락하는 둥근 중력
화살촉에 제 가슴을 내어준 사과의 눈빛, 
모두 붉은빛이었다는 사실.
눈 밝아지려 태초의 여자가 훔친 것도
과일이 아니라 붉은빛이다
어느 날 아침
딸아이의 몸에 붉은빛 비친다고
축하해 주라며 활짝 열린 아내의 입술이 붉다
빛이 갈라지면서 꿈도 흩어진다
흩어졌다고 타오르지 않은 꿈 없다
창백하게 걸린 저 초승달도 
한땐 붉게 타올랐다고, 꿈을 기억한다고
뜨겁게 덴 가슴의 흔적 보인다
애초부터 붉은빛이 꿈이다

 


10. 달려라, 기차
 
                                                       강봉덕

그는 달리는 종족이다 달리는 것이 살아있음을 증명하는 한 방식이 된다  오늘도 푸른 행성의 길목을 질주한다 태어나고 죽는 것은 그가 달려가는 속도와 내가 걸어오는 시간이 먼 행성에서 우연히 겹쳐지듯 다가오는 것이다 
  
안착하고 싶은 욕망 때문에 그는 발이 없다 어느 행성에 슬쩍 멈추고 싶을 땐 길 위를 벗어나 평행의 경계를 무너뜨린다 달리는 것이 숙명이라는 듯 꼬리를 자르고 도망친다 그때마다 그는 긴 울음만 한 번씩 들려줄 뿐, 어둠속을 질주하는 것은 독버섯 같은 이중성. 운명은 얼음처럼 뜨겁다
 
성운에서 태어나 성운으로 돌아가는 그와 난 유연관계다 나는 가끔 그에게 접붙이고 싶다 질주하는 그에게 올라타고 싶어질 때가 있는 것이다 우주 안에 들어있던 별똥별이 힘껏 내달린다, 되돌릴 수 없는 시간
  
지금, 먼 행성을 달려가는 그가 탈선하려는지 기웃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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