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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시 ‘변희수 시인’후드티를 생각하는 계절 외 9편
복지TV청주방송 | 승인 2019.11.26 09:44

〔이름〕 변희수

〔약력〕

경남밀양출생.

2011년 『영남일보』

2016년『경향신문』신춘문예 등단.

천강문학상 수상.

시집『아무것도 아닌, 모든』

 

 

 

 

 

 

 

1. 후드티를 생각하는 계절

                                                          변희수

벽에 오래 걸어둔 옷처럼

호박오가리가 마르고 있었다

천천히 오그라들면서 다시 어떤 내색이 생기는 것

 

아름다워라

차라리 和色이라면,

 

주렴같이 얼비치는 미색들을

왕년의 색이라 할 수 있을까

 

점점 더 숨을 곳이 필요한 사람처럼

줄어든 마음을 펴기 위해서

비행운이 그려진 하늘을

쳐다보았다

 

늦저녁

마을 어귀로 후드티를 입은 사람이 지나갈 때

 

더 쓸쓸한 사람이 덜 쓸쓸한 사람처럼 보일수도 있고

자루처럼 커다란 옷 속으로

들어가기 좋은 계절이라고 생각했다

 

꾸덕꾸덕 말라가는 것들 속에서

빼꼼이 고개를 내밀 수 있다면

그래서 어떤 짐작 같은 것이 생긴다면

내심 천천히 번져 나오는 

호박색 같은 것이었으면 싶었다

 

 

 

2. 가을숲

                                           변희수

그것은 하나의 분명한 형식이고

 

마지막 첨언처럼

우리는 떨어지는 것을 보고 있다 

슬로우, 슬로우, 퀵퀵 

우리의 발치에 도착하는 것을 보고 있다

 

하고 싶은 말과 멈추고 싶은 말 사이 

느린 템포로 돌아가는 입술

 

타오르는 말은 붉고

떨어지는 말은 노랗고

 

우리는 이 숲에서 몇 개의 말을 줍는다

빈나뭇가지를 올려보다가 고개를 숙인다

 

잠깐 묵념하는 사람이 되어볼 때

 

이곳은 하나의 세계관을 가진 것처럼 

고요하고 고요해서

숲의 발등을 밟을 때마다

슬로우 슬로우 퀵퀵

 

느리게 돌아도 도착하는 말이 있어서

고전에 물들어버리는 혀가 있었다

 

 

 

 

 

 

3. 요가 하는 사람들

                                                변희수

아치형의 자세를 유지할 수 있다고 

너는 건설한 몸을 보여주었다

 

나는 두개의 팔 속에서

거꾸로 쏟아지는 머리카락들이

교각 사이에 흔들리는

버들잎 같다고 말해주었다

 

다리를 건너서 어디론가 갈 것처럼

너는 상부와 하부가 하나로 연결되는 기쁨

 

언젠가 해인사 가을 홍류동을 건너다가 발견한

아름다운 곡선

다리를 허물며 너는

아치형이 자랑스럽다고 했다

 

이제는 무너져도 울지 않아.

 

쌓는 기쁨과 무너지는 기쁨을 동시에 알고 있는 것처럼

저쪽 계곡에서 이쪽 계곡으로 건너 온 사람의

얼굴에 홍조가 돌았다

 

어서와,

그렇게 손짓하면 붉게 물든 귓속으로

차고 맑은 가을 물소리가 따라왔다

 

 

 

4. 주말농장

                                                                 변희수

무밭 앞에서

아는 사람이 간수를 오래 뺐다는 소금을 나누어주었다

무슨 생각인지

못둑가의 갈대들이 숙인 고개를 자꾸 흔들었다

제대로 된 소금을 가졌구나

우리는 매우 기뻐했다

입속에 털어 넣은 소금이 녹고 있었는데

무밭은 지나치게 조용하고

겁 없이 푸르기만 하고

무들은 이미 풋것을 넘어서고 있었다

시험하듯 푸른 머리채를 쥐고 흔들어 보았지만

무들은 한결같이 명백하고

믿을만한 소금이라는데 덜 자란

주먹을 쥐고 무밭을 돌아 나오면

무질서하게 떨어진 낙엽들이 굴러다녔다

쥐를 노리는 들고양이가

숨은 그림처럼 무밭을 돌아다녔지만

누가 누구를 부르는 소리

주말 같은 건 너울너울

건너가도 좋겠다고

우리는 숙인 고개를 끄덕거렸다

 

 

5. 야채가게에 갑니다 나는

                                             변희수

오늘은 시들시들

부활하고 싶어서 야채가게에 간다

보들보들하고 야들야들한 것은 없나요?

죽은 몸에 물을 뿌리면

살아난다고 야채가게가 웃는다

노란 파프리카가 웃는다 빨간 피망이 웃는다

아프리카의 망령들이 웃는다

조금만 더 기절해있을게

조금만 더 죽어있을게

시들시들 이파리들이 찡그린다

챙모자를 쓰고 온 한낮이

집행관처럼 푸시시 꺼져가는 살을

꼬집어본다 흔들어 본다

멱살을 잡고 고개를 들고

그러니까 보들보들 야들야들

웃어야지 웃어라

너는 도대체 왜 안 웃는 거니?

누런 떡잎 아래 벌레 먹은 표정이

땀을 흘린다 송송 구멍 난 질문을 골라서

오늘의 바구니에 담아야지

단호박은 단호하고

양배추는 힘껏 오므릴 줄 안다

감자와 양파가 환부를 숨기며

웃는다 그래 웃어야지 웃자 제발 좀!

벌레처럼 꿈틀꿈틀

다시 태어나도 다시 갈 것 같은

야채가게에 갑니다 나는

 

 

 

6. 목소리 A

                                               변희수

바닥에 떨어지면서 컵이 산산조각이 났다

 

배울 점이 있다

빙빙 돌려서 말하려다가 정면으로 부딪힐 때

입술을 열고 반짝이는 게 있다

 

남아서 계속 주의를 요하는 게 있어서

따라 해보려다가

 

컵보다 먼저 손목을, 어리석음을, 날카로움을

컵들은 왜

틈만 나면 둘레를

 

긋는 다는 것은

진심을 다해 무찌른다는 것

 

여기 타이밍을 놓치지 않는 컵이 있다

용기에 대해서 조각조각 설명해보려다 아악!

부들부들 떨고 있는 손이 있다

 

그러니까 말하려는 바가 무엇입니까,

다그치기도 전에

 

또랑또랑한 목소리로 사라진 컵이 있어서

이 근처는 뾰족하고 위험해보이지만

 

분명하고 투명한

목소리가 있다

 

다시 깨어나고 있는 것처럼

전과 후가 확연히 다른

 

 

 

7. 그리스양식

                                                 변희수

모든 집들은 흰색이고

신들의 거주지처럼 사람들이 보이지 않았다

시작인데도 끝같은 색

유추할 수 있는 게 없다는 것

현지인처럼 검은 안경을 끼고 돌아다니다가

하얗거나 밝은 빛에 부딪혀 멍이 들었다

소경처럼 더듬더듬

오래된 글자를 찾아 읽다가

바다가 보이는 언덕에 앉아 있으면

바다가 바다를 떠올리듯

떠나온 곳이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너를 생각하거나

나를 생각하는 일이

신의 일 같아서 까마득했다

돌을 깎아서 마음을 만들거나

기둥을 세운다고 해도

양식樣式이 되지 못할 거라고

검어지지도 못하고 흰빛으로만

바래어지는 것들이 있었다

모두 볼모가 되어서 오래 눌러앉은

色이었다

 

 

 

8. 장미의 기분

                                               변희수

장미를 따라 걸으면 뻗어가는 기분이 든다

 

한 번은 웃을 수 있을 것 같다

한 번은 할퀼 수 있을 것 같다

한 번은 불러낼 수 있을 것 같다

전적으로 전투적으로

한 번은 붉을 수 있을 것 같다

 

꽃잎 위에 얼굴을 얼굴 위에 꽃잎을

겹치고 겹쳐서 새빨간 장미가 되었나

상냥한 아가씨처럼

장미 가까이에 얼굴을 대어본다

 

넘볼 수 없는 유물로 얹혀 있는

청동의 줄기 끝

 

불타오르는 정오의 가시울타리

 

9. 비수기의 결혼식

                                    변희수

한곡의 노래가 사라지는 동안

녹고 있는 얼음

 

서로의 얼굴에

뜨거운 입김을 불어넣으며

아름다운 조각이 녹고 있었다

 

불속으로 걸어 들어가듯

새하얀 드레스가 녹고 있는 신부

불가능한 얼음처럼

붉은 입술과 검은 속눈썹이 흘러내렸다

 

시들지 않는 꽃을 주세요!

허공으로 떠오른 손들이

얼음 속으로 꽃다발을 던져 넣었다

입과 귀가 동시에 녹아내렸지만

영원한 리본이 속삭였다

 

아름다워요!

얼음 속에서 처음 나온 것처럼

누군가 휘파람을 불었고

누군가 돌아서서 눈물을 찍어냈다

 

사는 동안

사라지는 동안

뜨거운 불이 발등에 떨어지는 동안

먼저 녹아서 흐르는 노래

 

다른 방의 연주자가

한여름 밤의 꿈을 연습하고 있었다

얼지 않았는데도

추웠다

 

 

10. 물위의 시간

                                          변희수

나루에서 당신과 나는 배를 탔지

통통거리는 물위에 나란히 몸을 얹었지

물이 우리를 가랑잎처럼 

먼 곳으로 데리고 갔지

바람 속이던가

노을 속이던가

거꾸로 박힌 풍경 속에서 기우뚱  

생이 흐렸지

물을 믿는가?

당신은 물었지

흐름을 믿는다고.

목마른 사람처럼 나는 말했지  

기름처럼 떠서 물끄러미

배 지나온 자리 돌아보았지 

벌어진 상처가 떠오르듯

휘어진 물의 등뼈

우리를 태우고 다니던 물의 시간들

우리는 나루에서 멀어졌지

바람 속이던가

노을 속이던가

울렁거리던 잠시 잠깐의 쓸쓸

지나가는 물결이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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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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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순진 2019-12-08 16:05:29

    시를 올리실 때 퍼온대로 올리시면 시 행간 간격이 한 칸 더 떨어져서 읽기가 어려운 것 같아요. 좋은 시입니다.   삭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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