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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시 '이서화'이서화 원고 조율 외 9편
복지TV청주방송 | 승인 2019.10.08 12:12

[이름] 이서화

[약력]
* 강원도 영월 출생
* 상지영서대학교 문예창작과 졸업
*《시로여는세상》신인상으로 등단.
* 시집『굴절을 읽다』가 있음

 

 

 

 

 

 

1. 조율

                                                                      이서화

 놀이터에서 아이가 넘어지자
 울음이 몸 밖으로 확 쏟아져 나온다
 엄마의 품에 안긴 아이,
 아코디언 같다 

 오래전 불안의 연주에 울어 본 기억이 있다
 집을 묻고 엄마를 묻고 이름을 묻던 불안의 한때를 기억한다

 그 후 미아迷兒가 되고 싶기도 했으나
 많던 불안들은 다 어딘가로 사라지고 없다
 온몸을 맡기고 싶은 울음이 없었다

 아이의 몸 안으로 울음을 넣어주는 엄마
 얼룩으로 번진 울음과 흐느낌을 토닥거려 
 몸으로 다시 들여보내는 저 조율의 한때
 불안한 음이 가득 들어 있는,
 유년의 중심은 발이 너무 가볍다

 비스듬히 기울어 있는 나무들에서 바람이 쏟아진 후
 다시 잠잠해진 가지들
 지상의 사물들도 모두 조율의 시간을 갖는다
 공중으로 펴지는 물줄기와 온갖 소음들이
 오후의 놀이터를 조율하듯
 어둑한 한기가 몸에 시절을 묻고 있다

 

2. 굴절을 읽다

                                                       이서화

 베란다 유리창에 어둠이 내리면
 거기, 유리의 거실에
 말 없는 가족이 평면으로 다정해 보인다.
 어쩌다 눈 마주친 여자가 나를 본다.
 어둑해지면 나타나서
 저녁이 만든 평수에 살다 가는 굴절의 가족이 있다.
 어쩌면 그들은 기슭의 부족이 아닐까.
 문을 열면 캄캄한 공중으로 흩어지는 불안한 세상의
 불안한 후예들은 아닐지.
 
 어쩌다 저들은 얇은 강화유리에 세 들어 살고 있을까.
 창문 밖에서만 웃고 떠들고 있는
 닫혀 있는 가족.
 
 화분들이 자라고 드라마가 방영되고 쾅하고 문이 닫히고 커튼 뒤에 숨어서
 미닫이문을 열면,
 한쪽 문으로 옮겨가는 굴절의 저녁
 너무도 익숙한 풍경들이
 몇 평 창문 불빛에 매달려 산다.
 
 강화유리 두 장 너머
 불안한 사람들은 여전히 불안하다.
 모든 공중엔 흔들리는 겹겹이 있고 모든 불빛엔
 꺼지고야 마는 밝기가 있다.
 밝은 시간엔 사라졌다 어둑한 저녁에 둘러앉는 
 딸각, 불 끄는 가족들.

 

3. 둥근 방

                                          이서화


양파는 늦가을부터 초여름까지
여러 겹 나이를 한꺼번에 먹는다
알뿌리들은 뿌리를 묶고
줄기로 바람을 불어 넣는다

겨울 동안 온갖 바람을 다 들여놓고
부풀어진다고 생각했었다
양파를 까고 칼로 반을 자른 양파 속에는
눈물을 쏙 빼게 하는 질책이 들어있다
눈물을 직감하는 일들처럼
어떤 양파 앞에서는 저렇게 여러 겹으로 
웅크린 채 울어본 적이 있다
그런데도 내가 둥글어지지 못한 이유는 
매듭지을 뿌리도 바람을 불어넣을 
긴 싹이 없었기 때문이다
겉부터 속까지
여기저기 울긋불긋 마음 쓸 겨를이 없다
그냥 사납게 매워지자고 
웅크리고 울었던 기억밖에 없다

울지 않아야 둥글어진다

 

4. 종자 장醬

이서화

 어디서 어디까지 흘러가는 그믐밤일까
 문을 닫은 채 고요한
 뒤란의 탐사선들

 항아리 안에서 그믐이 익어 가고 있다 부침개 끝에도 살짝 묻어 있던 그믐, 할머니의 짭짤한 잔소리 맛이다 봄날 냉이 무침이나 한여름 푸성귀 무침에도 검은 그믐이 뿌려져야 풋내가 잠잠해진다

 그믐을 덮고 있던 검은 잠을 걷어내면 과묵한 얼굴이 보인다 소금버캐처럼 마른 구름을 품고 한 집안의 종자를 키우고 있는 하늘

 밤하늘 한쪽에서 조용히 어둠을 살피는 그믐달처럼
 뒤란에 놓여 있는 오래된 항아리
 어느 천체를 흘러가는 우주선 같다

 

5. 숫돌

                                                    이서화

낫을 갈던 오래된 숫돌 

움푹 패인 하현달이
마당 한구석에 있다
낫이 갉아먹은 달
산등성이 하나를 베면서 지나갈 것 같은
시푸른 낫 날

아버지 입원한 보름 동안
붉은 노을이 진다
서걱서걱 날이 서던 소리에 으스스 몸 떨던
들판의 잡풀들은 억세지고
날을 맛보던 손끝도 무뎌진 지 오래다

움푹하게 패인 아버지 어느 곳에
허리 굽은 달하나 들어왔을까

어스름 저녁, 
낫을 갈던 아버지의 휘어진 등도
패인 숫돌을 닮았다
낮달에 붉은 구름이 지나고 붉은 구름을 지나고
또다시 구름이 끼는 동안
등 뒤로 잠시 떠올랐다 사라지는 달

빈 곳인 듯
들어찬 곳인 듯한 아버지는
지금도 허공에 
쓸모없는 낫을
여전히 갈아 놓고 있다

 

6. 울음의 효능

                                                              이서화

 가지가 뻗어 나간 지점마다 피멍이 들어있다
 흔들리는 줄기를 오래 타이른 듯한 흔적                     
 뛰쳐나오거나 빠져나온 것들, 흔들리는 일종이다 
 오래된 굴절을 기록하고 있는 관절, 
 그 사이마다 효능이 붙어 있다
 공들여 퍼 올린 줄기의 많은 효능에 비해
 나무는 가볍고 속이 비었다

 마모의 효능이 몰려가 있는 시옷 모양
 누가 처음 그 아픔을 물어왔을까 
 고통이 오래 묵으면 효능이 된다고 누가 처음 알려 주었을까

 긴 팔을 벌리고 서서 바람을 가득 품고 있던 
 욱신거리는 통풍
 한밤 졸아들고 있는 저 요법과 
 달그락거리는 양은뚜껑
 나뭇가지들은 원래 흔들리는 푸른 뚜껑에 덮여 있던 것들

 나를 맡기고 몇 가지 효능을 사보면 안다
 나를 가장 잘 아는 병病이고 약藥이라는 것
 약효가 다 사라지는 때가 온다면
 피붙이들의 왁자한 울음의 효능밖에 남지 않을 것
 잠시 잊고 있던 발목이 시큰거리고
 접골목接骨木 한 묶음을 사서 주전자에 끓이는 한밤
 나무에 들지 못한 바람이 춥고
 구부정한 관절의 효능을 김으로 풀어내는  
 마지막 응집력들이 불 앞에 서 있다 

 

 

7. 악기점

                                                                 이서화

 몇 대의 소방차가 붉은 소리로 달려와 불을 끄고 갔다
 
 그 후, 
 악기점의 악기들은 소리를 잃어버렸다
 검게 그을린 공명에 갇혀 있던 소리를
 다른 소리가 느리게 삼켜 버렸다

 소리가 타는 냄새를 달팽이관에 보관해 두었다

 덩그러니 형체만 남은 악기들
 손가락이 녹아 찌그러지고 
 검게 타고 난 음표들이 우르르 쏟아졌다
 몸통이 사라진 몇 줄 현은 구부러져 있었고
 붉은색이 빠져나간 자리에 검게 그을린 연주가 매캐하게 남아 있었다 

 잿빛 연기에도 소리가 났다
 어쩌면 모든 소리는 검은색이었을지 모른다
 유리가 깨지고 목관木管들이 불타고
 수리 중인 악기점에 소음이 가득했다 
 소음에도 악보가 있는지 제각각 악기 소리를 흉내 냈다

 소리가 다 빠져나간 악기들
 수리된 음악들이 새로 진열되었지만
 한동안 바람 한 점 없는 무음無音의 날들이 지나갔다

 지금도 가끔 붉은 소리가 빠져나가는

 

 

8. 경마장

                                                                   이서화

 모래를 파내는 발굽엔 일정한 리듬이 있고 
 잔등이엔 방향이 있다
 말은 제 고삐를 보며 내달리는 짐승, 
 선택할 수 있는 시야는 오래전 거세당했다
 엘피판 위 바늘은 같은 속도로 돌고 트랙엔 잡음이 심하다
 양철지붕 위엔 긁히는 빗소리가 여전하다
 말은 휘어지는 바람을 여물로 먹는다
 발주가 시작되고 편자는 미세한 진동을 밟고 서 있다
 어쩌다 사족四足을 모두 지면에 두었을까 
 엇박자의 근육을 갖게 되었을까

 모래 위를 달리는, 폭풍처럼 소멸의 지점을 향해 달리는 말
 마권이 난분분 흩날린다
 일순간 꽃이 되지 못한 꽃잎들만 바닥 가득하다
 모래엔 빠르게 지나간 빈 발굽이 버려져 있고
 헐렁한 휴일이 어지럽다

 악기들이 섞여 돌고 
 끊임없이 돌아야 할 말들의 지축에 흰 버캐가 묻어있다
 수직으로 서 있는 수천 장의 투레질을 귓속에 넣고
 서서 잠드는 경주마들
 
 경주가 없는 날 바람을 닦는 인부들 
 경마장의 적요는 재즈풍이다

 

9. 오후만 남은 일요일

                                                         이서화

일요일의 숫자들은 
어느 곳에 끼워 맞춰도 잘 맞는다
장례식과 결혼식을 가리지 않고
모처럼의 늦잠과 낚시와 목욕탕의 뜨끈한 몸
일요일의 숫자들은
무릎 나온 오후에도 딱 들어맞는다
몇 건의 계약이 풀리고 아무리 꽉 묶어도 
핑계들은 제멋대로 느슨해진다
직장이 사라지고 약속들은 몰려다니고
배달 오토바이 소리가 더 분주하다

신들이 복무하는 날
주일에서 시작되는 달력 속 빨간 날짜
그 옛날에는 아마 눈과 비도 
빨간색 혹은 파란색으로 내리지 않았을까
그렇다면 파란 열매와 빨간 열매들은 
얼마나 오래된 일요일의 숫자들일까

사과가 일요일의 색깔로 익는다
꽃이 일요일의 색깔로 피었다
사과의 일요일과 꽃들의 일요일은 짧지만
무중력으로 유영하는
당신이라는 숫자

사과에 검은 별이 뜨고
벌레들은 사과 밖으로 나오고

 

 

10. 바람 조문

                                                              이서화
               
 한적한 국도변에 조화弔花가 떨어져 있다
 내막을 모르는 죽음의 뒤끝처럼 
 누워있는 화환의 사인은
 어느 급정거이거나 기우뚱 기울어진 길의 이유겠지만
 국화꽃들은 이미 시들어 있다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단단하게 여물어가는 잡풀 속
 며칠 누워있었을 화환
 사흘 동안 조문을 마치고도 아직 싱싱한 꽃송이들
 잡풀 속 어딘가에 죽어 있을 
 야생의 목숨을 위해
 스스로 이쯤에서 떨어진 것은 아닐까
 같이 짓물러가자고 같이 말라가자고 누워있는 화환
 보낸 이의 이름도 사라지고
 근조謹弔 글자만 남기고 시들어 간다
 
 길섶의 바랭이 강아지풀 
 기름진 밭에서 밀려난 씨앗들이 누렇게 말라간다
 누군가 건드리면 그 틈에 와락 쏟아놓는 눈물처럼
 울음이 빠져나간 뒤끝은 건조하다
 지금쯤 어느 망자도 며칠간의 축제에서 벗어나
 한숨 돌리고 있을 것 같다

 먼지들이 덮여 있는 화환 위로
 뒤늦은 풀씨들이 떨어진다
 밟으면 바스락거릴 슬픔도 없이 흘러가는 국도변
 가끔 망자와 먼 인연이었다는 듯 
 화환 근처에 뒤늦게 찾아와 우는 바람 소리만 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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