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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시 '김수정 시인'빗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린다 외 9편
복지TV청주방송 | 승인 2019.09.03 11:00
 ▲ 김수정시인

〔이름〕김수정

〔약력〕

 * 대구 출생

 * 경북대학교 교육대학원 지리교육과 졸업

 * 『21세기문학』 신인상으로 등단

 

 

 

 

 

 

1. 빗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린다

                                               김수정

때로는 둥근 것에도 찔릴 때 있다

 

의안義眼이 빠져나간 눈꺼풀 속으로

익숙한 어둠이 고인다

선천성 시각장애의

뾰족해진 귀와 손가락들은

루셋큰박쥐 날개처럼 분주하다

 

수화기를 들었다 놓았다

어둑한 집안을 돌아다니며

장애가 찌그러뜨린 살림살이

귀가 읽는다

 

한 소리를 수백 번씩 그려보는 소년과

그의 어둠을 따라다니는 그림자

그들이 사는 집은 부산스럽게 고요하고

 

언제부턴가 비가 내린다

동그랗고 투명한 빗방울들이

창틀에 매달렸다 날아온다

물빛 날개 펄럭거리며

좁은 외이도로 몰려드는

 

빗소리, 빗소리들……

 

 

2. 꽃다발 묶는 것처럼

                                               김수정

너무 느슨하지 않게

너무 조이지도 말게

 

새 한 마리 손 안에 쥐었다 하자

 

내 삶에 꽃 같은 사람을 만날 때

그 인연과 오래오래 나를 묶고 싶을 때

 

 

3. 선인장

-인디언의 어떤 부족은 집도 생명체라

뿌리가 있어야 한다고, 집을 세울 때

먼저 선인장 몇 뿌리를 심는다 한다.

                                               김수정

종이 박스를 기워 만든 집에서

가는 울음이 새어 나온다

소말리아 모가디슈의 마디나 구역

종이 몇 겹이 지탱하는 단칸방에서

차도르의 바싹 마른 여인이 검보랏빛

아기를 어르고 있다

뾰족한 눈빛이 이방인을 찌른다

 

모래바람이 분다

 

처음으로 가져본 나의

집이 날아온다 모래알로 서걱대는

눈동자들을 피해

옥상에 지은 박스 집은

나만의 오아시스, 간혹 아라비안나이트를 읽다

옅은 잠에 빠지면, 나만큼 어린

개밥바라기별이 흔들어 깨우던

 

모래바람이 또 분다

 

해마다 이삿짐을 싸면서

나는 온몸에 눈물을 저장해 두었다

사막여우처럼 넓은 귀를 가시로 숨겼다

아직도 건기, 메마른 강

날카로운 가시 사이에 감춰둔 꽃을 찾아

깊은 눈매의 너는

몇 개의 사구를 건너서 올까

 

어느새 싸늘해진 밤하늘

먼저 뿌리 내린 별들이 길 없는 길을 비춘다

 

 

4. 하지의 밤

                                               김수정

눈물이 나를 바라본다.

 

나는 눈물 속으로 스며

동그랗게 부푼다.

 

불꽃으로 일렁인다, 모닥불로 타오른다. 검은 눈썹, 꿈틀거리는 미간.

 

긴 비를 예고하는 바람이 분다.

 

당신이 눈을 감는 순간

나는 사라진다.

 

주르륵 흘러내린다, 이슬로 부서진다. 짧은 밤, 태양의 축제가 끝나면

 

사슴의 뿔처럼 슬픔이 돋고

 

나는 또다시 황도(黃道)를 따라

긴 눈물자국을 끌고 간다.

 

 

5. 팽나무

                                               김수정

단청이 벗겨진 대웅전 모퉁이,

늙은 팽나무는 한쪽 귀만 열어 두었다.

이끼가 잔털처럼 세파를 걸러주는

울퉁불퉁 길쭉한 귓속,

이따금 호기심 많은 동자승이

겹겹이 쌓인 운지버섯 귀지를 파주면

귓불을 움찔거리며 시원타 한다.

귓구멍으로 일개미가 수시로 들락거리고

슬픔을 물어온 두견새가 한나절 울다 가면

정수리 한 귀퉁이가 콕콕 쑤시기도 하련만,

내색을 않는 팽나무 보살.

이 절과 함께 늙어온 사람들은

백팔 배 후에도 못내 버리지 못한 마음을

팽나무 귓가에 쏟아놓곤 하지.

낡고 서럽고 자그마한 이야기들은

외이도外耳道처럼 좁고 긴 뿌리를 지나

칡넝쿨 우거진 계곡 물소리로 흘러

아무도 그 사연을 알아차리는 이가 없다.

입이 무거운 도반이 다녀간 후에는

듣는 귀밖에 없는 보살님 귓속이

더욱 넓고 깊어진다.

 

 

6. 별꽃 피는 밤

                                               김수정

내가 당신을 사랑하여

이 작디작은 꽃이 보인다

 

당신이 나를 사랑하여

저 멀리 있는 별이 보인다

 

나를 만나기 전에도 피었을 꽃이

당신을 만나기 전에도 빛나던 별이

이제야 보인다, 드디어 보인다

 

둘인 듯 하나의 꽃잎으로

온 생애를 건너온 별빛으로

 

우리가 서로 사랑하여

세상의 낮고 어둔 땅에서

찬란한 별이 피고 있다

 

 

7. 눈동자

                                               김수정

옛집 대청마루 밑에는

어둠이 켜켜로 쌓여있다.

삐걱거리는 마루 골 따라

빈집의 그늘을 더듬는 눈빛

기우는 석양이

구멍 난 옹이 속을 들여다본다.

오랜 침묵에 터져버린

눈물 몇 방울,

내가 그리도 갖고 싶던

오빠의 유리구슬이 금빛 그물에 걸린다.

실패에 감긴 암고양이 울음소리,

할아버지 술주정이 실린

고무신 한 짝도 묻혀 있는 곳.

가는 발목이 마루 끝을 서성거리며

날개 달린 백마를 기다리던 밤,

발을 헛디딘 별빛 하나가

이 심연의 맨 아래에 가라앉은 건

영롱한, 그 슬픔의 무게가

가장 크기 때문일 것이다.

 

 

8. 빗방울酒 名人들

                                               김수정

사람들 사이를 헤매도 비워지지 않는 근심이

매지구름으로 드리우면

나는 숲으로 간다.

 

굴곡 많은 소나무

옆구리에 흉터투성이 고로쇠나무

관절 툭 툭 불거진 대나무들의 숲으로……

 

그들은 대부분 늙고 침침해진 눈을 지녔지만

멀리서 내가 오는 것을 용케도 알아보고

빗장을 열어준다.

 

오랫동안 한 자리를 지킨 숲의 노장들은

언제나 어석더석한 손으로도

내가 가져간 근심덩이를

감칠맛 나게 발효시키는 비법을 지녔다.

 

숲의 초입에서 시음을 권하는 장미처럼

매혹적인 색은 없지만

그 향기는 깊고 그윽하다.

 

가끔 달큰한 추억이 방울방울 뜨고

빛바랜 슬픔도 녹아들며 익어가는

오래된 숲의 발효주

 

어쩌다

허리 굽은 소나무의 눈물이나

왕년을 들먹이는 대나무의 허세가 섞이기도 하지만

그것도 오래 묵은 삶의 맛이려니,

걸러내지 않는다.

 

도시에서 짊어지고 간 감정의 지게미들을

숲의 장인들이 빚은 술 한 동이와 바꿔 마시고

나는 다시 돌아갈 힘을 얻는다.

 

 

9. 끈

                                                                                              김수정

엄마 잃은 고양이가 따라왔네. 몽글몽글 한 덩이 실꾸리였네. 목덜미를 간질이고 등허리 쓸어주면 줄무늬 꼬리가 하느작거리네. 짧고 까만 속눈썹 안으로 살풋, 둥근 잠을 들이다가도 내 발소리에 화들짝 깨는 나비. 나비는 나를 팔랑팔랑 따라다니네.

 

나비가 좋아하는 건 한 줄의 끈. 군데군데 매듭진 끈을 핥고 빨고 제 몸에 둘둘 감긴 줄도 모르고 야옹 야옹 찾아다니네. 가끔 장난기로 뭉친 끈을 휙 집어던지면 앞발을 쳐들고 달려 나가는

 

나비를 이제는 내가 따라다니네. 나풀나풀 봄바람을 따라간 아이와 서든 어택*이 잘라버린 웃음소리 대신 나비를 따라다니네. 동그란 눈동자에서 뱅뱅, 늘씬한 꼬리 잡고 졸졸. 밤늦도록 오지 않는 아이들 기다리며 한 뼘쯤 오그라든 핏줄을 따라 나비, 나비가 가릉거리네.

*서든 어택(sudden attack): 총, 칼 등으로 무장한 군인이 등장하는 온라인 게임.

 

 

10. 미역국을 끓이며

                                               김수정

방문 잠그는 날이 많아졌다

너는 갯바위처럼 웅크려있고

미역귀만큼 오글쪼글 접힌 말들이

문턱 앞에 툭 툭 던져져있다

 

문지방이 갈라놓은 저편에서, 너는

무슨 꿈을 꾸느냐?

 

시원의 바다를 헤매고 있느냐?

너를 낳고 가끔씩, 앨버트로스처럼

날고 싶어 퍼덕일 때 있었다. 그때마다

신열로 축축 늘어져 내 발목을 휘감던

 

너의 열일곱 번째 생일상을 차린다

나를 키워준 바다를 향해

바락바락 대들던 내 열일곱에도

뜨끈한 미역국은 놓여있었다

 

무겁게 드리운 커튼을 열자

이마로 쏟아지는 햇살,

오랫동안 말라있던 기억을 불려

돌미역 같은 아침을 주물러 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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