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여백
HOME 문학콕 당신의 시
당신의 시 '류인채 시인'돋보기 외 9편
복지TV청주방송 | 승인 2019.08.20 10:04

〔이름〕 류인채

 ▲ 류인채 시인

〔약력〕

 * 충남 청양 출생

 * 인천대학교 대학원 국어국문학 전공 문학박사

 * 제5회 계간 《문학청춘》신인상, 제9회 국민일보 신춘문예 대상 당선

 * 시집 : 『소리의 거처』(인천문학상 수상), 『거북이의 처세술』 등

 * 경인교대, 성결대, 협성대, 유한대 등에서 시와 글쓰기 강의,

 * 인천평생학습관 ‘나의 삶, 자서전 쓰기’ ‘위대한 기록, 중년의 글쓰기’ 강사

 * 계간 《문학청춘》 기획위원, 계간 《학산문학》 편집위원, 내항문학회장

 

 

 

1. 돋보기

                                                         류인채

배가 볼록한 돋보기

아버지는 이 확대경으로

빛을 모으셨다

 

검은 동그라미로 본

그 밝은 약속을

한 획 한 획 정성 들여 공책에 적어

자식들에게 주셨다

 

이 작은 돋보기 하나로

홍해를 건너고

가나안까지 거뜬히 넘어가셨다

우리가 잠들었을 때도

여리고성을 몇 바퀴나 도셨다

 

어둠 속에서 고요히 빛을 만나고

병상(病狀)을 들고 걷기 위해

쉬지 않던 아버지,

치매도 살라 버리셨다

 

가끔 흰 융으로 유리를 닦으며

가슴에 자리 잡은 우상도

하나씩 깨트리셨다

 

내게 그 밝은 눈을 물려주신 아버지,

 

볼록한 중심으로 빛을 모아

아버지가 가신 하늘을 펼쳐 본다

 

미처 가보지 못한 구석구석까지 환하다

-2017년 제9회 국민일보 신춘문예 대상 당선작

 

 

2. 고등어

                                                         류인채

그 여름

행상 나간 아버지

고등어는 종일 손수레 위에서

이 동네 저 동네 떼로 다녔다

지느러미들은 빗금 같았다

 

고등어 몸통은 캄캄했다

그 저녁 아버지는 비린내와 함께 돌아왔다

가문 논바닥 같은 손에서

누런 러닝셔츠와 밀짚모자에서

비린내가 났다

아이 하나 빠져 죽었다는 도림저수지에서도 비린내가 나고

질경이 바랭이 강아지풀에서도 비린내가 났다

 

빈손의 무게에 휘청거리던 아버지

썩은 고등어들을 죄다 쓸어 두엄에 묻던

아버지의 검정 고무신 뒤축에 피가 엉겨 있었다

 

그 저녁

고등어를 찢어발기던 자식들의 젓가락질

쫄깃쫄깃한 살을 다 발라먹고

아가미와 눈알도 파먹고

즐거운 밥상

 

뼈만 남은 아버지

-『거북이의 처세술』(황금알, 2016) 중에서

 

 

3. 황도

                                                         류인채

복숭아나무에 삭힌 닭똥을 주며 복사꽃만큼 환하게

웃던 아버지

봄이 되자 여기저기서 꽃들이 만발하고

어디선가 벌 떼 몰려오고

바람 불면 꽃잎들 후루룩 날아 퍼지고

그 자리 푸른 열매들 조랑조랑 단추처럼 매달렸지

초경을 치른 언니 젖가슴이 그랬으려나

여름이 무르익자 풋복숭아는 누렁이 젖퉁이처럼 부풀

어 올랐지

그깟 것 심어놓고 고추 농사 깨 농사 작파했다고 어머

니가 잔소리해도

복숭아나무 둘레를 맴돌던 아버지

이마에 목에 흐르던 땀 손등으로 닦으며

잘 익은 복숭아 소쿠리 가득 담아 사립문 성큼 들어섰지

마당 가 우물에 솜털 살살 문지르던 복날

한 입 베어 물면 입안 가득 퍼지던 팔월의 단물

아버지는 여전히 텃밭을 떠나지 못하셨는지

무덤가 하늘이 황도 빛으로 익는 지금

복숭아 가지마다 황도가 주렁주렁

저 물렁물렁한 복숭아 속에는 중심이 있지

씨처럼 단단한 아버지가 있지

-『거북이의 처세술』(황금알, 2016) 중에서

 

 

4. 애관극장 그 골목집

                                                         류인채

그해 겨울

 

늦가을까지 담장을 기어오르던 마른 담쟁이 넝쿨이 철

조망 같았다 녹슨 양철 대 문을 밀면 어지러운 발자국들

이 스무 개쯤 돌계단을 내려가고 있었다 계단 중턱에 맞

닿은 처마, 처마 밑 들창, 지상과 맞닿은 창을 통해 발바

닥과 먼 하늘을 보았다 쪽마루의 부엌과 바퀴벌레가 기

어 다니던 방 한 칸, 남동생과 나와 언니와 언니의 백수

애인까지 끼어들고 주말이면 동생 친구들이 대여섯씩

몰려와 석유곤로 위에서 부지런히 라면을 끓이던 날들,

극장에는 닥터 지바고의 포스터가 붙고 나는 찬밥을 말

아 먹으며 답동성당의 종소리를 들었다 주인집 아들의

검은 가죽 잠바 옆구리의 칼자국, 그 틈으로 밤꽃 냄새

가 났다 그가 버린 꽁초가 밤하늘을 가르며 포물선으로

떨어질 동안 나는 매일 뜨개질을 했다 언니의 캄캄한 연

애는 퉁퉁 불은 라면 같았고 오래 묵은 바위처럼 단단해

지던 나의 사춘기, 나는 먼 세상을 읽기조차 두려 웠다

-『거북이의 처세술』(황금알, 2016) 중에서

 

 

5. 소리의 거처

                                                         류인채

아 ― 힘껏 소리를 내보낸다

바람을 타고 멀리 흩어지는 소리의 꼬리들이 허공을 쓸고 간다

말끔하고 텅 빈, 허나

공중 어딘가에 꽉 들어찬 소리의 나라

 

수많은 뼈가 흙이 되고 핏기 잃은 땅이 객토할 동안 허공은 투명한 소리의 뼈로 일가를 이루었을까

가끔은 비행기의 머리에 찢어진 굉음들, 빌딩 옥상으로 떨어진 소리의 비명도 있다

 

허공의 집

어린 날의 어설픈 휘파람소리 그에게 들킨 수줍던 첫말

젊은 아버지의 조곤조곤한 목소리가 쌓여있는 곳

 

저 목련 나무의 희디흰 젖니도 모두 그곳에서 온 것일까

 

아, 하는 순간 봄이 벙글고 화장을 고친 버드나무 종아리에 물이 올라 소리에 살이 찌는 계절

보이지 않는 소리의 나라는 핼쑥한 겨울 산의 무릎 같은 곳

버림받은 힘으로 다시 일어서는 힘줄 퍼런 소리가 저곳에 밀집해 있다

저 빽빽한 허공을 비집고 봄이 와서

꽃물이 번지고 배 밭이 환하다

 

봄꽃에 매달린 소리가 한꺼번에 피고 진다

-시집 『소리의 거처』(황금알, 2014) 중에서

 

 

6. 돌의 날개

                                                         류인채

남한강 물속에서 주워 온 돌 하나를 손바닥에 올려놓았습니다

남한강이 돌처럼 둥글게 돌아나갑니다

얽히고설킨 물의 살이 돌 속을 굴러갑니다

 

어린 날 강가에 서면 습관처럼 물수제비를 뜨곤 했습니다

지느러미처럼 돋아나던 돌의 날개들

암벽에 살고 있던 내용 모를 벽화들이 물의 접면에 배를 대고

날아가는 소리 들렸습니다

 

새의 조상은 어디에 날개를 묻었을까요

묶인 날개들이 풀리는 순간

어떤 힘이 돌을 날게 한 것일까요

 

돌들의 나이가 궁금했습니다

그러니까 물수제비는

그 유선형의 시간을 수평선 너머로 던져보는 일

 

날아가는 돌의 발소리에 물새들이 날개를 파닥입니다

부메랑처럼

머지않아 추락할 날개를 달고

돌은 힘껏 날아갑니다

 

지금은 돌팔매를 견뎌야 하는 시간

짐승의 부리를 꺼내

바람보다 앞서 날아야 할 시간

-『소리의 거처 』(황금알, 2014) 중에서

 

 

7. 거북

                                                         류인채

전동차 문이 닫히는 순간 덜컹

미처 빠져나가지 못한 목과 두 팔이 문틈에 끼었다

성급히 빠져나간 두 다리만 문밖에서 버둥거린다

그러나 폐지 자루를 움켜쥔 손은 완강하다

손등에 적힌 갑골문자가 그가 헤맨 도시의 길들을 보여주고 있다

 

움켜쥔 자루는 꿈쩍도 않고

門이 큰칼 *이 되어 깡마른 노인의 목을 겨누고 있다

 

절룩이며 거둔 따끈한 뉴스들

아무렇게나 접힌 아침이 너무 육중하다

방금 전까지 선반을 더듬던 손은 나무토막처럼 뻣뻣하고

쫓기듯 두리번거리던 눈빛은 단도처럼

자루에 꽂혀 있다

 

안도 밖도 아닌 그 노인

눈만 끔벅거린다

이쯤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여러 번 당해 본 일이라는 듯

뜻밖에 덤덤하다

 

쇄골이 산맥처럼 뚜렷하다

찰나에 백 년이 지나간다

 

잠시 후 방송이 나오고 잠깐 문이 열리고

그는 늘어진 목을 천천히 제자리로 거두어들였다

 

*중죄인의 목에 씌우던 형구.

-『소리의 거처 』(황금알, 2014) 중에서

 

 

8. 암사동 빗살무늬토기

                                                         류인채

강 언덕 야산에 우거진 졸참나무 숲은

이 항아리에 모두 담겼다

그때 누군가의 뒤주였을 토기

도토리와 물고기 뼈 화석이 보여주는 그들의 밥상이 소박하다

갈판에 도토리껍질을 벗길 동안

산으로 강으로 내달린 돌창은 하루치의 끼니를 겨냥했을 것

움집에 걸어들어 온 재티 묻은 저녁이

화덕에서 거뭇거뭇 익어갈 동안

목젖에 갇힌 말도 함께 부풀었을 것이다

항아리 아가리에 빗살무늬로 찍힌 육천 년 전의 말

밋밋한 거죽에 나뭇가지와 대나무와 생선가시가 스쳐갔다

그릇에 옷을 입힌 투박한 손

그때부터 우리는 무늬를 숭배했던 것일까

긁히고 파이며 흙은 제 몸의 상처를 무늬로 받아들였다

그렇다면 내가 받아들인 상처는 어떤 무늬로 남았을까

나는 가끔 마음의 무늬가 딱딱해서 미간을 찡그린다

연신 문질러도 지워지지 않는 양미간의 표정

조각조각 이어진 재생 토기는 순하고 고운 무늬를 지녔다

이 투박한 마음이

해안가 구릉 깊이 묻혔다가 불쑥 드러난 이유는 무엇일까

나는 근원적인 맨몸의 언어를 읽기 위해

이 질그릇의 말에 귀를 기울인다

-2013년 제1회‘서울 암사동 유적 세계유산 등재기원 문학작품 공모전’ 최우수작

 

 

9. 양파

                                                         류인채

너무 많은 것을 함축한 이 구체(球体)는 무엇입니까

일 중독인 남편과 어린 딸을 두고 바람난 엉덩이 같은

정부 쪽으로 구부러진 어깨 같은

그것은 무엇입니까

 

폭주족들은 왜 어둠을 끌고 달려갑니까

오토바이들이 중앙선을 넘어 반대편으로 거슬러 간 뒤

진한 양파 냄새가 납니다

 

사랑해 그러니까 믿어 줘

 

통유리 너머 뚱뚱한 저 여자는 순식간에 양파 한 접시를

다 먹어치웠습니다 저 외로움은 몇 겹입니까

 

남발한 양파들이 함부로 굴러다니는 저 거리는 어디입니까

-『소리의 거처 』(황금알, 2014) 중에서

 

 

10. 거북이의 처세술

                                                         류인채

이 딱딱한 등껍질은 내 평생 다락이고 서랍이지

말랑말랑할 땐 벼룩이 슬쩍 건드려도 죽은 척

잽싸게 목을 밀어 넣고

내 작은 서랍 속으로 숨었지

배가 보이게 뒤집히면 세상도 벌렁 뒤집히니까

계단이라도 와르르 무너지면 나도 죽어라 버둥거리지

등껍질을 벗는 동안 단단해졌지

다리를 접고 목을 움츠리면 물때 앉은 돌덩이지

무시로 햇볕에 나가 젖은 발바닥을 말리지

처처에 악어가 숨어 있는 세상

몸통이 잘려 통째로 먹힐지도 모르지

서랍 속에서 목을 빼고

눈과 코만 내밀어 숨을 쉬지

서랍이 약간 기우뚱해도 뒷다리를 펴고 기지개를 켜지

오래 쟁여 둔 책 위에서 뛰어내리지

그럴 땐 목구멍이 분홍 꽃잎이지

갈퀴와 이빨은 꽃잎으로 가리고

먼지가 자욱한 다락에 발자국을 찍으며

순간순간 그렇게 가는 거지

-『거북이의 처세술』(황금알, 2016) 중에서

webmaster@ccwtv.kr

<저작권자 © 복지TV청주방송,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복지TV청주방송의 다른기사 보기
icon인기기사
기사 댓글 0
전체보기
첫번째 댓글을 남겨주세요.
여백
여백
신문사소개기사제보보도요청광고문의불편신고개인정보취급방침청소년보호정책이메일무단수집거부
충북 청주시 흥덕구 1순환로 581-0(봉명1동 892번지)  |  대표전화 : 043-268-4441  |  팩스 : 043-268-4009 / 043-278-4441
등록번호 : 충북아00159  |  등록년월일: 2015년04월23일  |  통신판매업신고 : 제 2018-충북청주-0260 호
청소년보호책임자 : 이용범  |  발행인/편집인 : 박용동
복지tv충청방송의 기사를 무단 전재 · 복사 · 배포 등을 금하며 이를 어길 시 저작권법에 저촉됨을 알려드립니다
Copyright © 2019 복지TV청주방송. All rights reserved.
Back to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