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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시 '김설희 시인'산이 건너오다 외 9편
복지TV청주방송 | 승인 2019.08.16 09:39

〔이름〕 김설희

▲ 김설희 시인

〔약력〕

 * 1962년 경북 상주 출생

 * 2014년 『리토피아』로 등단

 * 시집 『산이 건너오다』

 

 

 

 

 

1. 산이 건너오다

                                                          김설희

속을 다 비운 산이 어디 먼데를 돌아 제자리로 왔다

 

그가 흘린 것들이 무엇인지

어디를 돌아 왔는지

아무도 모른다

 

당신의 가랑이를 슬쩍 지나간 바람 같은 것

당신의 정수리에 그림자를 드리우다 간 구름 같은 것

교통사고 현장에서 누군가의 피를 밟고 지나간 발자국 같은 것

 

그런 시간들이 그의 속이었을까

 

세상 감옥을 벗어난 물렁한 산 하나가 누워있다

산맥 같았던 핏줄이 얇은 살가죽을 겨우 들고 있다

가죽의 파랑사이 흙냄새가 물씬 솟아난다

헐거워진 아랫도리에서 계곡 물소리가 찔찔거린다

 

속을 다 버린 산에는 슬픈 새소리마저 사라졌다

 

벌거숭이, 누가 어디를 만져도 부끄러움이 없다

 

헐렁한 산은 이제 눈을 감고

지나온 대지에 깊숙이 뿌리박을 것이다

그리고 산은 다시 산으로 건너갈 것이다

 

 

2. 바람의 특성

                                                          김설희

날개를 가진 것들은

바람이 가득 찬 것들이야

 

팽팽한 것들의 껍데기는 얄팍해

터지기 전

양을 줄이려면 날개를 저어야해

 

날갯짓은

부풀어 오른 몸이 어쩔 줄 몰라 하는 거야

 

바람이 날개 등을 타고 훠이훠이 길을 나서는데

길에는 아롱아롱 빛나는 것들이 많아

유흥시설처럼 꽃들이 열려있어

어딜 가도 오락 같은 시간이야

 

날개를 저을수록

탱글탱글한 바람이 수그러드는 것 같아도

사실은 새 바람이 자꾸자꾸 생성되고 있어

멀리 날아가려는 속성이 더 키를 세웠는지

하늘 높이 허공을 젖더니

느닷없이 풀들이 살아있는 땅 쪽으로 내려오는 거야

 

바람의 본능은 방향을 바꾸는 일이야

 

 

3. 허공에서

                                                          김설희

탯줄이 어디 있는 줄도 모르는 잎 하나가

끊어진 거미줄 한 올을 잡고 달랑거린다

 

공중이다

사방이 바람이다

 

어느 틈 기척만으로도 움츠러지는

바싹 오그린 몸이 매달려 있긴 땅이 멀다

하늘도

구름도 아득히 멀다

 

삶 한 장이

보일 듯 말 듯 한 오라기를 부여잡고

몸부림치면 칠수록

깊이 흔들리는 허공

 

저 허공을 할퀴는 것이

내 놓지 못한 목숨일까

가느다란 숨을 죄는 바람일까

 

언제 녹아내릴지 모르는

한 생이

 

 

4. 꽁지

                                                          김설희

가지에 앉고서도

저렇게 꽁지를 흔드는 것은

새로 앉은 가지의 무게를 재는 것일까

가고자 하는 다른 방향을 재는 것일까

 

몸의 가장자리

그러나

몸의 중심

 

어둠 한 벌 털어내고 햇살자리에 앉는 순간

바닥을 가리키는 꽁지

드디어 흔들리는 가지와 새가

균형을 잡는다

 

꼬리를 아래로 늘어뜨린다는 것은

비로소 평안해진다는 것인가

 

그 자리에서 한참 가장자리를 털다가

하늘 한 번 보고

다시 꽁지를 아래로 내리는

 

 

5. 가시 끝도 자라면 둥글어진다

                                                          김설희

탱자나무

꽃 진 자리가 가시 끝이다

계단 끝에 걸쳐진, 막 시작한 아이의 걸음처럼 배꼽 하나 맺힌다

 

무시로 바람이 다녀가는데 배꼽이 커진다

이따금 비가 놀다 가고

해의 콧노래가 자박거리는데

떨어진 꽃을 찾아가는 길처럼 부푼다

 

그럴수록

탯줄과는 멀어진다

 

멀어진다는 것은 자란다는 것

 

자란다는 것은

장벽이 많아진다는 말인가

보호해야 할 것들이 늘어난다는 말인가

 

커진 배꼽의 기원을 생각하는데

황금빛 탱자 향이 부르터 올라

가시 끝이 그만 둥글어진다

 

 

6. 어느 연주회

                                                          김설희

손가락 지문이

건반을 부지런히 건너다닌다

지문의 흔적 따라 운율처럼 돋는 소리

 

눌린 건반들

웃음이 자지러진다

울음이 까무러친다

 

저렇게 기절하는 것들

한 땀 한 땀 잇대가며 생의 긴 끈을 만들다

 

웃는다

운다

 

음악은 끊임없이 연주되고...

 

 

7. 가장 가벼운 날

                                                          김설희

찻물을 끓여요

찬물이 끓는점을 찾아 가는 동안

화장실을 거처 뒷문으로 들어오는 가을을 잠깐 만나고

돌아온 사이

탁자위에 얹어 둔 가방이 사라졌어요

 

악어가 끈덕지게 물고 있던

볼펜 두 자루

카드 두 장이 든 지갑

해 넘긴 수첩 한권 올해 수첩 한권

자동차 면허증 단발머리사진 주민번호

시집 한권 안경 선글라스 USB 두 개

......

 

악어 한 마리가 나에게서 멀어졌는데

 

달아오른 물이 화끈거리고

뜨거운 수증기를 뿜는 주전자는 덜컹거리고

녹차를 기다리던 사람은 온데간데없고

없는 가방을 찾는데

닫힌 문마다 끓는 물소리처럼 들썩거리고

 

나의 눈과 손

나의 재산

나의 역사가

나를 두고 나를 벗어났는데

 

차(茶) 대신 가방을 들고 나간 앞니 하나 빠진 사나이

지금 어디쯤 가고 있을까

어디까지 나를 데리고 갈까

 

내가 지배해온 악어 한 마리가 나를 떠난 날

 

나를 그물처럼 옭아매고 있었던 악어 한 마리

에서 내가 벗어난 날

 

 

8. 우물

                                                          김설희

이끼 돋은 원시의 우물 하나 있어

 

울타리가 우물의 어깨를 반쯤 덮을 때

제 키보다 몇 배 긴 두레박 끈을 슬슬 사리더니

우물로 확 풀어내는 여자

 

두레박 같은 편지가 웅숭깊은 우물에 닿기까지

무한히 비틀거렸어

비밀한 낱말들이 부딪히며 어긋났어

 

깊이 고인 물까지의 거리에

바람이 일고 천둥 치고

한 동네가 우울해졌어

 

우물에 꽃이 피었어

겹겹 퍼지는 꽃잎이 파랗게 질렸어

우물은 아득해져 그만 눈을 감아버렸어

 

빈 듯 꽉 찬 편지 한 장 다녀갈 때마다

우묵한 동네는 파리하게 슬펐어

 

깊이도 넓이도 모르는 이들이

갈증이 나거나

더러운 때가 묻거나 서러운 사랑이 돋아날 때

 

시시로 거기 편지를 던졌어

그러면 우물은 새로 돋은 꽃잎을 아래로

아래로 가라앉히고

 

 

9. 무릎

                                                          김설희

포장의 끝은 매듭이다

내용물이 사각이거나 길쭉하거나 둥글거나

잘쏙하게 리본이 장식한다

 

리본을 나비의 시조라 해도 될까

어디든 날아갈 수 있는 비단

 

잠자리 소쩍새 메뚜기 두루미...

날개를 들어 자신을 옮기는 것들

 

당신의 몸 어디에 리본이 있어

여기서 저기로 꽃소식을 옮긴다면

 

날아갈듯 활짝 날개를 펴고

내용모를 소문이 굳게 닫혀있다

 

마음 가는 데로 무릎이 난다

나비처럼 훨훨

 

저 무릎

어디로 건너가는 징검돌인가

 

꽃집 아가씨가 꽃다발을 묶는다

날개처럼

저 무릎

 

 

10. 밤

                                                          김설희

세상은 밤이야

그림자를 해방시키는 밤

 

목을 누르고 칼 든 손에 거머리처럼 튀어나온 힘줄이

튕겨져 나간 밤

터진 고무줄 같은 밤

몰래 명의 이전한 땅문서를 장롱 속에 넣어두고

밤이라고 우기는 밤

정수리를 감고 도는 햇살이 쨍쨍한 밤

 

밤 속 같은 밤

 

멀건 대낮에 쓰레기로 가득한 가방 하나 들고

동굴 같은 지하철을 타고 어둠 속을 떠도는 밤

네모난 상자들이 흔들리며 흘리는 납작한 빛을 따라가는 밤

 

멀쩡한 장미를 제집에다 옮기겠다고 한낮을 톱질하는 밤

 

톱도 톱날도 안 보이는 밤

꽃의 피비린내가 햇살을 덮는 밤

 

밤의 그림자가 어둠인가

 

달아난 흉기의 발자국을 찾아낼 수 없는 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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