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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시 '한이나 시인'구름의 기하학 외 9편
복지TV청주방송 | 승인 2019.08.09 09:43
 ▲ 한이나 시인

〔이름〕 한이나

〔약력〕

 * 94년 『 현대시학』 작품발표로 활동시작.

 * 시집 『 플로렌스 카페에서 쓴 편지』,『 유리자화상』외 4권.

 * 한국시문학상, 서울문예상 대상, 내륙문학상 외. 2018년 세종나눔도서 선정

 

 

 

 

 

1. 구름의 기하학

                                                   한이나

백자빛 구름밭을 일궈 수수만 평이다

바탕색 파랑을 다 감춘 구름의 기하학

구름의 선으로 울타리를 친다

 

초록구릉이며, 모자 쓴 설산, 아몬드꽃의 진심들

 

사랑은 어둠 깊이 숨었다가

그어진 선보다 먼저 도착하는 빛깔

왼종일 허공에 뭉게구름으로 둥실

선을 벗어나고 싶은 선

 

어떤 구름은

슬픔이 무거워 수직으로 흘러내리는 눈물이 된다

 

 

2. 씨앗 저장고

                                                   한이나

솔방울만한 아기나무의 손을

쥐었다 펴본다

탯줄로 이어져 땅의 중심이 될 생동生動,

씨앗 한 톨의 내력이

몸의 경전이다

 

아라라트산 중턱 노아의 방주에서

씨앗으로 잠들어 있던,

몇 만 년 전의

나를 만난다

 

깊어지는 피안과 차안의 잠 사이

썩어 거름과 소생의 몸 사이

 

내 안에 환하게 불이 켜졌다

 

씨앗 한 알 속에 내가 뜨겁게 들어있다

 

 

3. 울음터

                                                   한이나

한바탕 울만한 곳을 찾아 평생을 헤매었다

 

해거름의 요동벌 울음터

하늘끝 땅끝이 맞붙어 분간할 수없이 넓은

지평선의 해와 달이 들판에서 지고 뜨는 이곳

목놓아 울기에 참 좋은 자리

 

여기서 천 이백리 산해관까지

살면서 차마 울지 못했던 울음

이제 맘놓고 실컷 울어나 볼까

 

천만년의 비바람이 만들어낸

망망한 시계 앞에

그간의 억울함과 괴로움 다 고해가며

우레와 천둥 같은 울음 목청껏 토해나 볼까

 

연암의 발자국이 멈춘, 너른 들 요동벌에 서서

북받치는 설움 곡비처럼 쏟아내고

내게 남은 길 가뿐히 걸어 나가야겠다

 

 

4. 벌레 자서전

                                                   한이나

붉은 열매 산사나무 밑

초록벌레로 잠을 자고 싶다

겨울 썩은 낙엽더미 속 나만의 나라

땅 속 내 방 어둠에 누워

초록벌레의 잠을 자고 싶다

꿈 무지개에서 떨어져 나를 알아보지 못할

변신도, 두렵지 않아

뼈와 살을 갉아먹고

축약된 굽이길 바람길 헤매도, 겁나지 않아

내 몸에 향기 머금어

하늘까지 퍼지고 싶다

 

황홀이여 아득하여라

 

우화등선하는

저 나비, 봄으로 날아간다

 

호접몽 속 길이며 이름이며 문이 되어

 

 

5. 먼지의 시간

                                                   한이나

나는 먼지의 시간이다

 

눈 깜박할 사이, 찰나

손가락 한 번 튕기는 사이, 탄지

숨 한 번 쉬는 시간, 사라질 티끌의 순식간

 

어느 새 서쪽으로 된바람이 급히 길을 건너고

천변의 찬 물줄기는 시린 발목 적시며 겨울로 간다

물 속 두 발 담근 채 우두커니 재두루미

어금니 깨문 수천 리 비행, 혼신을 쉴 때

 

먼지의 시간이 날개를 단다

상처가 키운 생의 무게를 버리고

진사빛깔로 환하게 날아오른다

먼 길 떠난 사람들이 보인다 명, 승, 창

그들의 책을 열면 다녀간 울음의 흔적들이

붉디붉은 열매로 맺혀있다

 

나는

한순간 먼지의 집을 버리고 공중을 떠돌다가

어느 마을 호롱불 밑에 가볍게 착지 할 것이다

땅 속에 내린 뿌리 나의 끝은 너의 앳된 처음이므로

 

 

6. 벌목

                                                   한이나

톱을 갖다대는 순간

숨을 죽이고 눈을 감고 있었다

연륜이 잘려 나가고

뿌리를 받치고 있던 땅이 신음했다

살과 뼈가 잘려나가며 피를 흩뿌렸다

나무의 피

봄쪽으로 팔을 뻗쳤던 햇빛이 잘려나갔다

붐비던 귓가의 음성이 잘려나갔다

높새바람이 잘려나갔다

톱질 소리에 산의 중심도 흔들렸다

축축한 땅의 기억도 잘려나가서 흰 톱밥이

세상바닥에 알알이 흩어졌다

톱밥 알갱이 속에 들어있는 지나온 시간

 

나는 안다

나무의 몇백년 삶의 집중력

그 중심이 일순간 침묵할 때

숨을 죽일 때의

톱을 빼내고 재빨리 몸 피하는

벌목꾼의 마지막 순간을

 

 

7. 환생의 방식

                                                   한이나

비단이 스쳐 바위가 닳는다는

한 겁, 한 생이

어떻게 고요히 저무는지

전생을 세어 본 적이 없다

 

낙뢰가 모래밭에 날카롭게 내려 꽂혀

우루루 우루루 길 밖으로

어떻게 파도를 몰고 가는지

태풍의 향방을 쫓아가 본 적이 없다

 

소라의 귀를 막는다

수평선 너머 천리안의 눈을 감는다

물고기 지느러미를 건드리는 고래의 입을 막는다

 

긴 울음처럼 멀리서 밀려오는

너울성 파도, 막무가내

 

난기류의 물살 시퍼런 목숨을 건너는 하루가

태풍이다

한 겁이다

 

 

8. 색경色經

                                                   한이나

빛보다 어둠을 즐기기로 했다

이제 나는 어둠 속에 있기를 희망한다

가장 까만 검정색은

섭씨 천 이백도

슬픔의 불을 태운 자만이 얻는 색경이다

 

죽음 같은 통점,

하나도 두렵지 않다

가장 까만색을 알아버린 사람만이 얻는

색경,

 

나오니 삶이요 들어가니 죽음이다

 

노자를 읽는 밤,

허공에서 길을 찾는다

 

 

9. 파랑의 형식

                                                   한이나

파랑은 바닷가에 두고 온 사랑의 형식이다

울트라마린에 0.1프로의 기쁨을 섞으면

가장 밝은 파랑이 되고

99.9프로의 우울을 섞으면

가장 어둔 파랑이 되었다

 

나는 해변의 길 잃은 구름

진한 슬픔 청색시대였다가

파랑을 찾아 꿈속까지 뒤지는 일

 

사랑하지 않으려고 애썼던 마음이다

 

세상이 온통 파랗게 보이는

산토리니의 둥근 지붕, 론강의 밤하늘

슬픔에 잠긴 성모마리아가 기도하는 모습의

저 파란 망토까지,

 

파랑의 기쁨과 우울을 딱 절반씩 섞어

파도마다 날려 보냈다

형식을 걷어내면 남는 것은 파랑 안의 흰색, 순결무구

 

 

10. 폐사지에 와서

                                                   한이나

양양의 미천골 폐사지 앞,

왈칵 눈물이 났다

산 아래 대홍수와 산사태로 매몰되어

혼자 남은, 삼층석탑 사지

절터에 무너져 뒹구는 와당瓦當의 슬픔들

서늘하다

 

귀꽃 구름무늬 새겨진 8각의 석등,

암키와 수키와를 얹은 팔작지붕도

소리가 없는 법고 목어 범종도

모두 자리를 잃고 천년 입을 봉했다

 

기둥과 서까래와 대들보를 잃고

주춧돌만 남아 그림자로 빈 절을 지키고 있는

외진 폐사지,

 

여기저기 폐허를 서성이다가

당간지주 되어 내가 한나절 울음처럼 서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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