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여백
HOME 문학콕 당신의 시
당신의 시 '손영 시인'에스프레소 외 9편
복지TV청주방송 | 승인 2019.08.06 09:36
 ▲ 손영시인

〔이름〕 손영 시인

〔약력〕

 * 마산교육대학 졸업

 * 부천 신인문학상 수상

 * 부천 문화 예술 공로상 수상

 * 계간 <시인정신> 시부문 신인 등단

 * 글샘문학회 회원, 내항문학회 사무국장(現)

 * 시집 <공손한 풀잎들>

 * 동인지 <꽃밥>외 다수

 

 

1. 에스프레소

                                                                                                       손영

뒷목 뻣뻣이 굳은 새벽이 흐리다 식탁 위의 빵 한 조각을 씹으며 서류를 가방에 넣고 출근을 서두른다 사무실 안의 싸한 냉기가 몸을 감싼다 커피포트에 물을 올리고 아메리카노 한 잔을 기다리며 일과표를 훑어본다 서서히 주변이 깔끔하게 떠 오른다

 

뒷목은 여전히 뻣뻣하다 머리에서 쓴 한약 냄새가 난다 김과장의 머릿속에 한방에 톡 털어 넣을 농축 된 해결책을 모아 짧고 진하게 보고서를 쓴다 김과장은 기안서류를 곁눈질로 보더니 툭 한쪽으로 던진다 종이들이 한 장 한 장 빨랫줄에 걸린 호청마냥 펄럭이며 날아간다 지금 감정은 에스프레소

 

낮 열두시, 퇴근 전 완성해야 하는 기안서에 뒷목은 더 뻐근해 온다 머리에서 뇌가 쏟아질 것만 같다 혼자 점심을 먹는다 갓 태어난 아이와 말갛게 웃고 있는 아내와 암 투병 중인 어머니 얼굴이 떠오른다 자반고등어를 머리부터 뼈째 꾸역꾸역 씹어 먹고는 자리로 돌아와 파인 다크 초콜릿 조각을 똑똑 분질러 입에 넣는다 입 안 가득 카푸치노가 퍼져나간다 돌아온 기안서류에 우유거품을 듬뿍 뿌려 수선 한다

 

뉘엿뉘엿 넘어가는 늦가을 햇살이 창문턱에 걸려 있다 몇 잎 남지 않은 은행나무에서 이파리 하나 팔랑 떨어져 내린다 여전히 퇴근 뒷목이 뻑지근하다 화면 속에서 나온 서류 뭉치를 머리에 넣고 동료들과의 술자리에서 쏟아낸 불만, 라떼의 달달함이 읽혀진다 오가는 말 가장자리에 김과장을 올려 씹는다 설탕이 듬뿍이다 달콤하다

 

김과장의 일그러진 얼굴을 가방에 쑤셔 넣는다 먹다 남은 초콜릿과 로스팅으로 새까맣게 탄 커피도 한쪽에 쑤셔 넣고 집으로 간다 까맣게 탄 가루와 김과장 얼굴이 믹서 된 가루를 화장실 바닥에 붓고 물을 내린다 홀가분하다

 

 

2. 그의 혀

                                         손영

그의 혀는 예리한 감별사

냉동실을 거친 것은 바로 알아차리고 고개를 돌린다

바다에서 금방 건져온 싱싱한 생선이라는 가게주인의 떠벌림도

냉장과 냉동의 차이를 어김없이 짚어내는 그의 혀

늘 한 수 위였다

 

옆집에서 갖다 준 반찬

맛집에서 재어온 불고기를 감쪽같이 내 솜씨로 둔갑시켜도

귀신같이 알아내는 그의 혀 “이거 어디서 난 거지”

 

맛에는 그토록 예리하지만 말에는 무감각인 그의 혀

툭하면 냉동상태로 내어 놓는다

내 말이 미처 끝나기도 전에 “됐어, 알았어, 그만”

급냉으로 튀어 나오는 말끝마다 살얼음이다

오늘도 얼음조각 같은 말의 모서리에 치여

종일 입을 봉한 채 내 혀는 입천장에 단단히 붙어있다

건조대에서 그의 바지를 걷어 꼬깃꼬깃하게 뭉쳐

다시 세탁기에 던져버리는 나를 본 그

쏟아 논 말들을 쓸어 담더니 렌지에 넣어 버튼을 누르고 있다

해동 된 말로 슬며시 내 옆구리를 건드려도

구겨진 내 입은 풀리지 않는다

 

한밤중에 백과사전을 놓고 그 혀의 근원이 무엇인지 뒤적여 본다

냉동인 말을 찜통에 넣고 뼈대만 남도록 고아도보고

현미경에 굳은 혓바닥을 놓고 들여다보고

새벽까지 혀의 족보를 불빛에 비춰도 본다

 

아무리 살펴보아도 수선은 도저히 안 될 것 같다

 

 

3. 봉인된 기억

                                         손영

끝없이 줄지어 선 복숭아나무 사이로

봄이 오고 바람과 햇살이 드나들었다

가지마다 단물이 흘러내리는 이곳은

내 기억의 중심

늘 그곳에서 과육의 향기가 날아온다

 

그 기억의 끝자락에는 포클레인의 굉음이 매달려있다

계절이 제 입을 떼기도 전

꽃을 버리고 건물을 선택한 도시는 신도시 대열에 합류했다

복사꽃빛의 땅은 모두 빌딩 속으로 사라졌다

 

꽃들이 매장된 거리

콘크리트로 포장을 끝낸 도시는 낯선 얼굴로 다가왔다

봄의 푸른 무릎으로 일어서던 마을에

분양을 알리는 전단지들이 꽃잎처럼 날아다녔다

 

고열로 펄펄 끓던 동생에게 떠먹이던 달콤한 황도복숭아

침이 고이던 물컹한 기억도 이제 딱딱해졌다

 

마트에 즐비한 복숭아통조림, 이 많은 복숭아는 어디에서 왔을까

 

이곳에서

문득, 사라진 복사꽃밭을 보았다

 

 

4. 해바라기밭

                                         손영

계절의 패잔병들 고개를 푹 숙였다

 

출렁이던 황금 갑옷은 빛을 잃고

칙칙한 몰골로 끝없이 늘어선 중대

바래고 해진 추레한 군복 걸치고

빈 들녘에 줄지어 서 있다

 

태양이 겨냥한 과녁은 저 해바라기

폭탄처럼 쏟아지던 햇살의 투하에도 묵묵히

전선을 지키듯 자리를 지켰다

태양을 따라가던 승전의 노란 깃발

햇살의 탄알이 여문 씨앗들로 박혀있다

 

늦가을 들판

눈을 감은 채 해바라기밭에 묶인 포로들

목을 버려야만 그 자리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모두 고개를 떨구고 입을 닫았다

 

뚝뚝 포로들의 목을 따는 해바라기밭 주인

포획한 모가지를 차에 싣고 유유히 사라진다

 

 

5. 베껴 쓰기

                                         손영

식물의 생존전략은 의태擬態

옥수수를 베껴 쓴 옥수수밭의 기다란 풀

동글 넓적하게 콩잎을 베껴 쓴 콩밭의 풀

잡초들이 능청스레 베껴 쓰기를 하고 있다

 

풀과 작물의 모호한 경계

구분이 어려운 초보농사꾼

어린 작물을 뽑아버리고 잡초들을 남겼다

본색을 알기까지 한참을 기다렸다

 

풀들의 얼굴이 탱탱해지고 뒤늦게 근본이 떠올랐지만

이미 영역을 차지한 뿌리의 세력

호미의 끈기에도 쉽사리 물러서지 않았다

 

오독으로 사라진 콩과 옥수수

밭고랑으로 뽑아 던진 서리태는 죽고

명아주만 싱싱하게 살이 오른

나의 첫 농사,

 

그럴듯한 필체로

밭고랑까지 차지한 그들의 전략은

어눌한 호미를 번번이 속인다

 

 

6. 아름다운 잠입

                                         손영

빗방울이 강물 속으로 들어간다

망설임 없이

 

강물은

싫은 기색 없이 비를 받아들인다

 

빗물이 스미는 소리

강물은 한 가족으로 비를 맞이한다

물과 물이 합쳐지는 순간 나타나는 둥근 파문

빗줄기는 소리로 계약서를 쓴다

수많은 물도장을 찍는다

이것은 오래 전 둘만의 약속

한 번도 파기한 적 없는

물도장 계약서가 사방에 낭자하다

 

청아한 톤이 강물에 찍히는 소리

수많은 비의 음성

 

강물은 떨어지는 목소리에 귀를 세운다

빗소리를 녹취하고 쏟아지는 하늘을 저장 중이다

 

 

7. 엄마의 앞치마

                                                                    손영

엄마는 잿빛 투박한 앞치마를 두르셨다

어스름 새벽부터 앞치마는 비린내를 풍기며

인근 골목으로 배달을 다녔다

항상 아랫배에 매달려 젖어 있던 앞치마

퀴퀴한 냄새와 한숨소리도 다 들어있었다

종일 불어난 체중으로

양쪽 불룩한 주머니엔 땀에 젖은 하루가 담겨있었다

자정을 넘긴 늦은 시간

하루치의 노동을 셀 때는 생선 냄새가 났다

생계를 주무른 거친 손을 볼 때마다

꽃무늬 에이프런을 두르고

알반지를 낀 하얀 친구엄마 손을 생각했다

장시간 허리에 묶여 고된 일을 끝낸 하루가 풀릴 때

앞치마도 부종으로 시달린 다리를 접고

잠든 머리맡에 놓여있다가

새벽녘 부스스한 잠을 털고 일어나면

엄마의 허리를 잡고 함께 일어났다

 

엄마의 무릎처럼 튼튼한 앞치마도

조금씩 엄마와 함께 늙어갔다

내가 그토록 싫어했던 앞치마

가끔 장터에서 투박한 앞치마를 만나면

비린 향기에 그리움으로 울컥인다

 

 

8. 도시의 봄

                                                                    손영

봄보다 먼저 방문한 황사

도시는 재빨리 마스크를 쓴다

 

24시편의점,

정수기 판매원 삼각김밥을 앞에 놓고

휴대폰을 연신 들여다본다

전화번호를 검색하는 하루의 영업

채워지지 않는 허기가 다시 컵라면에 물을 붓는다

청년은 뜨끈한 국물로 충전중이다

실적을 채우려면 배터리를 꽉 채워야 한다

 

필터의 기능을 강조하는 정수기 판매원

정작 자신의 근심을 거르지 못해

늘 목이 마르다

방문객을 걸러내는 경비실

팸플릿 정수기보다 더 깐깐하다

좀처럼 열리지 않는 정문의 필터를 통과해야 한다

 

모서리 많은 세상

매운바람이 옷깃을 잡는다 군데군데 남은 추위로

을씨년스러운 거리, 메마른 계절은 표정이 없다

 

실업률이 올라가는 봄

방전된 청년이 다시 편의점에 앉아있다

 

 

9. 유리의 하소연

                                                                    손영

샤워 끝낸 투명한 내 피부 좀 보세요 구석구석 칫솔질로 반짝이는 치아를 들어내며 말했어요 이걸 보세요 나는 아무것도 감춘 것 없이 모두 보여 주쟎아요 사람들은 숨김없이 다 드러내는 내가 솔직하다며 좋아했어요

 

어깨너머로 풀밭과 패랭이꽃이 보이네요 페르시안 고양이가 내 곁에 앉더라구요 하얀 털을 만지려는 순간 손등을 할퀴네요 앙칼진 성깔에 놀라 몇 발자국 물러났어요 다시 쓰다듬으니 보드라운 털이 뱀처럼 서늘했어요

 

그날은 약속시간에 쫒긴 그녀가 헐떡거리며 뛰어왔어요 내가 미처 말릴 사이도 없이 곧장 내 품으로 뛰어 들더니 갑자기 얼굴을 감싸네요 코뼈까지 얼얼한가 봐요 넘어져 얼떨떨한 표정으로 나를 올려다보네요 무안해서 잠깐 은행나무 가로수 뒤로 숨고 싶었지만 주머니에 손을 넣고 아무 일 없었다는 듯 태연하게 서 있었어요

 

환하게 다 보여주어 모든 걸 알고 있다고 생각했던 그가 떠난 게 도저히 믿기지 않는다네요 사람들은 눈앞에 있는 것만 보고 왜 속에 든 투명한 뼈대는 보지 못하는 걸까요 졸고 있는 눈을 닫고 한번 쯤 손끝으로 미세하게 나를 읽어주세요 상처 입은 그녀가 내 어깨에 기대어 울먹이는 소릴 듣고 있으면 나는 정말 난감해져요

 

 

10. 양파

                                                                    손영

뒤란에서 한겨울을 지낸 양파 두개

신문지 한 장으로 추위를 견디며 싹을 틔우고 뿌리를 내렸다

봄 입김이 목이 쉬도록 불러낸 연한 이파리

나는 그 아우성 듣지 못하고

저녁반찬을 생각하며 싹을 도려내고 토막내어

다시 냉장고 안에 집어넣었다

 

베란다엔 겨울을 보낸 다육이와 칼랑코에가 핼쑥하다

분갈이를 마치고 마른 화분마다 영양제를 꽂았다

프릴 달린 얇은 꽃무늬 커튼으로 길목을 바꾸었다

봄의 왈츠를 크게 틀어 놓고

봄바람 속에는

내 안의 싹을 읽어준 엄마가 있다고 편지를 썼다

새싹에게 꽃들에게 그 편지 보내고 싶었다

 

거실 창으로 훌쩍 자란 백일홍과 산수국이 보였다

경비실 지붕위로 터질 듯 꽃을 매단 벚나무

그 곁에 조롱조롱 백열등을 켠 목련

경쟁하듯 불러낸 연두 노랑 분홍의 웃음소리 환한데

냉장고 속에 들어간

싹을 퍼올리느라 몸집 헐렁해지고 주름진 양파 손이 생각났다

 

막 시작된 사월이 어질어질 멀미를 하고 있었다

webmaster@ccwtv.kr

<저작권자 © 복지TV청주방송,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복지TV청주방송의 다른기사 보기
icon인기기사
기사 댓글 0
전체보기
첫번째 댓글을 남겨주세요.
여백
여백
신문사소개기사제보보도요청광고문의불편신고개인정보취급방침청소년보호정책이메일무단수집거부
충북 청주시 흥덕구 1순환로 581-0(봉명1동 892번지)  |  대표전화 : 043-268-4441  |  팩스 : 043-268-4009 / 043-278-4441
등록번호 : 충북아00159  |  등록년월일: 2015년04월23일  |  통신판매업신고 : 제 2018-충북청주-0260 호
청소년보호책임자 : 이용범  |  발행인/편집인 : 박용동
복지tv충청방송의 기사를 무단 전재 · 복사 · 배포 등을 금하며 이를 어길 시 저작권법에 저촉됨을 알려드립니다
Copyright © 2019 복지TV청주방송. All rights reserved.
Back to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