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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시 '이경애 시인'견고한 새벽 외 9편
복지TV청주방송 | 승인 2019.08.02 17:08
 ▲ 이경애 시인

〔이름〕 이경애

〔약력〕

 * 전남 곡성 출생

 * 춘천 사는 여자

 * 시집 『견고한 새벽』

 

 

 

 

 

 

1. 견고한 새벽

                                                     이경애

나는 죄가 많아 눈물이 많아....

그림자도 없는 새벽

외등을 지고 앉아 폐지를 고르던 노파가

느릅나무 열매 같은 혀를 내밀고 눈을 받아먹습니다

나를 보고 민망한지 빙그레 웃습니다

세상에 저런 천진한 웃음이라니!

무구한 꽃이 하늘하늘 피어나고

아직 따뜻한 혀로 녹인 눈(雪)물이

나비 되어 날아갑니다. 팔랑팔랑

팔랑팔랑 날아가 하느님을 깨우고

선잠 깨신 하느님은, 빨갛게

충혈된 눈으로 십자가를 먼저 닦습니다

별보다 많은 하느님들

여기저기서 깨어나시는데

찢기고 더럽혀진 폐지를 기도서처럼

수레 위에 모시고

견고한 새벽을 끌고 가는 노파의 뒤를

슬그머니 밀고 따라가며 나는 또

죄지은 것만 같아.

 

허름하고 누추한 사마리아 여인의 어깨 위로

눈은 또 나립니다

눈은 또 쌓입니다

 

 

2. 먼 산

                                                     이경애

괜찮다고 말하는 네가

꽃 없는 대궁처럼 허전했다

빈 자리 어디든 호수만 한

물집이 잡히는데

관절 부러진 설해목 아래

웅크리고 앉아

너애게로 갈 수 없다는

나비 전령을 보낸다

 

나비는 해닳아진 하얀 옷에 물결무늬를 아로새기며

날개만치 가벼운 모오리돌 하나 받아 들고 돌아오겠지

 

젖은 몸 말리는 동안, 나비

떠나온 산은

매미를 울음째 먹고

상수리나무 무녀리 열매를 훑어 먹고

울지도 않고 푸르지도 않고

더, 더 멀어질 테지

 

 

3. 빨래

                                                     이경애

무릎이 튀어나온 내 츄리닝 옆에

아들놈 츄리닝을 넌다

인심 쓴 눈대중으로도

석 자 가웃 남짓이나 될까 싶은

세월의 마디와 허리춤

바짝 틀어쥔 유전의 치수

 

헐거워진 틀니처럼 낡아버린

내 바짓단 밖으로 춥게

터져 나온 실밥들을 토닥이는

아들의 마른 다리

초유도 먹이지 못한 유선이 찌르르 땡긴다

내 속에서 나와 칭얼거리던 것이

나머지 生은 지가

다 걸어주겠노라는 듯 껄렁거리며

다 삭아내린 어미의 발목을

툭, 툭 친다

 

 

4. 자줏빛 살 속에 피는 무화과꽃처럼

                                                     이경애

애련의 서술에 지친 지상에는 비가 내리고

무화과 잎 몇

더는 모색할 수 없는 삶이라는 듯 저보다

더 쓸쓸한 벌레 울음 며칠 다독여놓고

꽃 없는 목숨을 끊는다

 

다홍빛 립스틱을 지운 것처럼

아주 잠깐, 세상은 어두워지고

 

남도로 떠날까

 

어느 해 가을

단 한 번 이별했을 뿐인데

자줏빛 살 속에 피는 무화과꽃처럼

수천 송이로 피어나는 너

해남 어디쯤

살고 있겠다던 너

 

 

5. 8월

                                                     이경애

잉잉거리며 벌 치는 사내나 따라나설까

싸리꽃처럼 새초롬하니,

은꿩의다리마냥 가냥가냥,

따라나 갈까

사내는 벌통을 놓고

꽃이 되려나 새가 되려나 모르는

나는 향기를 나르고 노래를 나르고

벌도 없는 한낮

너럭바위에 드러누워 딱총딱총

빠알간 콩알로 총쌈이나 할까

세상이 온통 나를 기일지라도, 밤마다

그 사내 버얼건 등짝에 북극성을 띄우고

길을 잃지 않으면

길을 잃지 않으면, 나 온전히

돌아와 첫눈 오는 소리 들으리

 

 

6. 탱자 꽃잎은 날리고

                                                     이경애

꽃 진 자리마다 무덤을 만든다고

슬픔이 아주 묻히기야 하겠습니까

마는, 잊은 척 살아보지요

육신의 온기 아무리 눈물겨운들

다리 저는 두레소반 더운 김 올리는

한 끼

밥만 하겠습니까

 

영 못 본다고 죽기야 하겠습니까

씀벅씀벅 눈꺼풀 떨리도록 진정한

이별의 시로

연명은 할 테지요

 

바람도 없는 오후 세 시, 탱자 꽃잎은 날리고

 

뒤로 가는 사람의 몸짓이 저

하염없이 날리는 새하얀 꽃잎도 같았다가

서슬 푸르게 지탱하는 가시도 같다는 걸

당신은

알고 가시라는 말씀입니다

 

 

7. 북항은 비

                                                     이경애

나의 애인은

이름도 아득한 북항에 있으리.

 

소금발처럼 내리는 비를 맞으며

오늘 하룻밤은 어느 횟집 처마 밑

아늑한 수족(水族)의 비늘과

찢긴 해초를 덮고 누워

우리 둘 사이의 먼 밤을 뒤채다

새벽, 는개와도 같은 밀항을 꿈꾸리

 

그는 지쳤을까

 

세상 어디에나 사랑은 있어,

낯선 얼굴 동그란 눈으로 다가와

위로가 되어 주면

나에게로 오는 길이 다 젖는 동안

거기에도 사랑은 있어

빗물처럼 누군가의 애인으로 고이다

파도 위에 잠이 들까

 

그렇게 항구의 노래가 되어 갈까

 

 

8. 해가 지면 그대도

                                                     이경애

해가 지면 그대도

쓸쓸을 보따리로 안고 돌아오나요

오늘, 아무도 그대에게 웃어주지 않았나요

집으로 가는 길은 가깝고 그대의 생각은 늘 먼가요

 

낮은 그림자로 달이 뜨고

별들 총총한 안부로 가득한 밤하늘을 보며

어쩌면 몇몇의 사람들은 가끔

누군가에게로 날아가고 싶을지도 모릅니다

암말 없이 날아가 꼬옥 끌어안고

함께 별이 되어 승천하고 싶은 사람,

여전히 변함없을 그 사람을

머릿속 가득히 들여놓고 그러나 무참하게도

여전히 묵묵할 밖에 도리가 없을지도 모릅니다

 

해가 지면 그대도

내가 돌아 나오던 그 모퉁이,

꼭두서니빛 이별이 새삼 슬픈가요

우리들의 이별은 아직 무사한가요

 

 

9. 능소화

                                                     이경애

나비는 꽃을 가려 앉지 않고

바람은 한 가지에 매이지 않습니다

 

세상 어느 것 하나도 내 것

아닌 것이 없으나 달리 보면

세상 무엇 하나도 내 것이 될 수 없어

간절이 구차한 밤

미처 닦아내지 못한 더위를 물리려

앞창 뒤창 다 열어 바람길을 트는데

늦도록 남은 꽃, 시울이 붉습니다

철 이른 풀벌레 울음 기어오르는 마루에 누워

바람과 달과 꽃을 낙낙히 보노라니

바람은 그만 가자 손목을 끄는데

저 꽃, 미동도 않고

폐궁(廢宮)의 한을 써 내려갑니다

한 줄 쓰면 마른 잎이 수런거리고

또 한 줄 쓰면 달빛이 흐려지고

구구절절 애곡단장.

 

한 철 살다 가는

꽃의 사연 읽느라 별이 지는데

사계가 무성한 당신은

단 한 줄도 읽히지 않습니다.

 

 

10. 나, 늙는다

                                                     이경애

한참인 줄 알았더니

나, 늙었다

웃음도 많고 눈물도 많아

꽃피는 날이면 피실피실 실없이 웃고

남의 말 들어주다 북받쳐 펑펑 울었는데

 

백화제방(百花齊放)!

꽃사태 진 언덕을 무덤덤이 넘어

낮달을 따라 걸어가는 서편 내리막길

 

쇄(灑) - 쇄(灑)

바람 끝 늙은 물오리나무

정수리에 피워낸 무수한 암수 꽃들

제 몸을 비벼 내는 소리

쇄 – 쇄

무릎뼈 드러나도록 피워낸 저 아름다운 경건.

 

웃지도 못하고

울지도 못하고

무언가를 잃어버린 봄날

나, 오늘 또

늙. 는.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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