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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시 '성희 시인'괜찮지? 외 9편
복지TV청주방송 | 승인 2019.07.26 13:31
 ▲ 성희 시인

〔이름〕 성희

〔약력〕

 * 1961년 대구 출생

 * 2015년 『시에티카』로 등단

 * 시집 『괜찮아 괜찮지』

 

 

 

 

1. 괜찮지?

                                          성희

그 집, 아직도 괜찮은지

그날의 집엘 가본다

 

오토바이 하나 겨우 비껴가는 골목 끝

미아처럼 쭈그러져 기다리는 집

이 도시의 최하위 행정구역 내당동 920번지

잡풀만 그득한 폐가에 돌보지 못한 꿈

쓰레기봉투에 담겨 던져져 있다

 

꿈조차 허기진 시절

아예, 날개를 접어버린 계집애는

꿈을 꾸면 안 되는 줄 알았다

지금 무너진 그 집 담벼락에

아니, 어릴 적 사그라진 그 꿈에

애처로이 떨어지는 말

괜찮지? 괜찮아

 

어른이 된 지금도 버릇이 돼버린

괜찮다는 말

누수된 수도꼭지에서 뚝뚝 떨어지는

울음 같은 말

 

괜찮아,

괜찮지?

 

 

2. 어떤 생애

                                          성희

나는 새우깡이다

번데기 속 애벌레처럼 숨죽여 있다가

해방되어 나온 새우깡이다

내 할아버지는 바다에서 등이 휘도록 열정으로 살았던

전설 속 긴 수염의 주인공

그것이 나의 계보다

일세를 풍미한 내가

무기력함이 탑처럼 쌓인 공원 의자에 앉아

씁쓸한 소주의 애인으로 몸을 섞기도 하고

하루에도 수십 번 낙엽 같은 비명을 지르며

까무러치는 죽음에 들기도 하지만

나를 창조한 인간들의 심심풀이로

기꺼이 부서지는 즐거움에 족하리라

나는 깡도 뭐도 없이 흐물흐물 녹는 것 같지만

깡다구로 뭉쳐진 새우깡

나의 비문은 인간의 가슴에 깡깡 새길 것이다

 

 

3. 해바라기

                                          성희

거울에 비친 이마를 보면 생각난다

기다림으로 늘어진 여린 모가지들

 

수저통 젓가락 삐져나온 듯

어린 다리 여덟 개

일 나가신 어머니 기다리기 심심한지

언니가 막내에게 툭 던지는 말

—아버지 언제 오시나 머리 긁어봐라

금방이라도 사 남매 이름 부르며 들어오실 거 같은

바람의 손짓, 그 무량겁의 주술

다섯 살배기 막내는 눈치가 빤해

뒤통수는 긁지 않고 이마만 긁어댔다

 

막내가 태어날 때부터 보이지 않던 아버지

누가 오대산 어느 절간에서 봤다는 풍문

수년이 흘러 장삼 자락 휘날리며

별빛이 창문을 베고 스며든 날

별빛처럼 잠시 비추셨다

 

그때부터 우린, 막내에게

—아버지 언제 오시나 머리 긁어봐라 했다

곧 오실 거라고 연신 이마만 긁어대지만

아버지는 오시지 않고

열어놓은 대문 소리에 촉각 세우던

바람 한 점도 없는 그 긴 밤이 야속했던

그 자리,

해바라기 피었다

 

 

4. 먹꽃

                                          성희

흰색과 검은색의 거리만큼 먼 그녀를 그린다

회색 스웨터 은비녀

먹물같이 잔잔히 번지는 미소

일생이 수묵 같은,

 

사변 이후

책 보따리 싸 들고 며칠만 있다 온다던 아들 찾아

봉화를 떠나 대구에 정처했다는 심선 할머니

 

어느 해 삼월 삼짇날

산역을 위한 초혼도 없이

사무친다 사무친다며

이름도 아득한 어느 못에

홀씨처럼 가볍게 날아든 그녀

 

일생을 걸어야 가 닿을 수 있는 구만리 장천에 뜬

그 먹빛

 

 

5. 어깨충돌증후군

                                          성희

내가 앓고 있는 통증을 만나기로 했다

움직일 때마다 기름이 마른 기계처럼, 끼이익

몸에서 나는 슬픈 비명

 

평생 쓰면 안 된다는 팔

수술하면 괜찮을 수도 있다지만

지푸라기같이 푸석푸석한 말

믿지 않기로 했다

 

수많은 사람과 부딪힐 때

작은 어깨로 안간힘을 쓴,

진이 다 빠진 거미의 똥구멍같이

늘어진 하나의 팔

 

난 그 팔 하나로, 지금

아이의 웃음소리를 퍼 올린다

 

 

6. 갱년기

                                          성희

숙성을 넘어서

온몸에 검버섯 핀 몇 개 남은 바나나

냉장고에 들어가지 못해

늙어서 쪼글거리는 사과 몇 알

용케도 버티어준 내 젊음을

같이 썰어, 건조기에 넣었다

 

그들은 밤새도록 납작 엎드려

물기가 다 마를 때까지 숨죽이며

제 향기 풀어 바람에 날리기 시작했다

 

다시는 나비가

닿을 수 없는 곳까지

 

말라간다는 건

이 세상 모든 결핍과 적막까지 사랑해야 하는

또 다른 시작이다

 

 

7. 깎다

                                          성희

사과를 깎고

당근을 깎고

베어낸다는 거

사람의 입속에 스며들기 위한

깎이는 통증

내가 나를 깎고

가벼워질 때까지

내가 나를 깎는다는 거

세상에 더 잘 스며들어 보려는 손짓

 

베인다는 거

옥깎아 내려지면서

너에게 스며들기 위한

결단의 칼질

 

 

8. 개조개의 성질

                                          성희

어물전에

개조개가 나와 있길래

근대국에 넣어 먹을까 하고

살았나, 죽었나

꾹 눌러봤다

개조개는

지가 살던 고향에서 하던 말로

씨펄, 몸을 움츠린다

다시 한번 꾹 누르니

입을 닫고 더는 상종하지 않겠다는 듯

온몸으로 거부하며 자신을 지킨다

하, 고놈 참

 

오늘 누가 나를 쿡쿡 찔렀다

교묘하게 쿡 찌를 때

나도 개조개처럼 온몸으로

씨펄씨펄이나 해줄 걸

 

 

9. 달방 있습니다

                                          성희

영천역 뒤쪽 낡은 골목길 지나가면

허물어져가는 담벼락

붉은 글씨의 ‘달방 있습니다’ 붙어 있다

오랫동안 붙어져 있었던지

바람 불면 곧 떨어질 것 같은 너덜너덜한 달방

 

그 달방을 슬프게 읽었다

아버지가 떠나가고 갑자기 바뀐 세상에서

펄럭이는 달방처럼 간당간당 보내야 했던

그때를 읽었다

 

땅거미 낮게 깔린 저녁 무렵 같은 사람이

달방으로 들어간다

하루하루 깎이는 달 속에 몸을 구겨 넣으며

옥토끼 두 마리 방아 찧는 꿈을 꾸는 사람에게도

한 달에 한 번은 만월이 뜬다

 

온종일 떠 있는 달방

 

 

10. 전사

                                          성희

휴일 아침

늦은 상을 물리고

잠시 눈 붙인 내 남자 코 고는 소리가

드르릉 드르릉이 아니라

으르릉 으르릉하고 난다

으르릉 으르릉거리다가

간간이 몰아쉬는 숨소리가

힘에 겹다

이 남자는 자면서도 온전히 잠들지 못하고

꿈의 경계를 허물고

살벌한 삶의 전선에 서 있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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