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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시 '이현서 시인'유빙遊氷 외 9편
복지TV청주방송 | 승인 2019.07.16 11:43
▲ 이현서 시인

〔시인〕 이현서

〔약력〕

* 경북 청도 출생.  

* 2009년 『미네르바』로 등단.

* 시집 『구름무늬 경첩을 열다』 

* 제4회 박종화문학상 수상.

 

 

 

 

1. 유빙遊氷

                                                    이현서

극지에서 우리는 떠돌았지

심장을 포개면 영혼의 살점마저 녹아내려

조금씩 높아지는 눈물의 수위

수면을 휘젓듯 통증을 헤집으면

수많은 균열음 사이로 설산이 빠져 나갔지

꿈속에서도 고향은 예감처럼

가끔 시린 향기를 몰고 왔지만

끝내 우리는 서로에게 무관심하기로 했지

폭설이 치는 저문 날 혼자 먹는 밥처럼

조금씩 남은 생을 파먹으며

먼 후생에 가닿을 부음을 미리 듣는 밤

생과 몰의 연대기를 표류해 온 얼룩의 심연에서

숨겨진 이름 하나 가까스로 꺼내본다

아주 잠깐 화해의 손을 내밀었던가

그믐 달빛아래 출렁이는 물결

천년 바람에 기억의 모서리마저 허물어지면

내재율로 흐르던 슬픔 한 조각

어둠의 폐벽 속으로 흐른다

 

 

2. 비가 사막을 건너는 동안

                                                    이현서

다시 수면이 반짝이네

 

희고 단단한 사리를 품은 갑골문이 마법을 푸는 우기

참방참방 지느러미를 흔들며 우주를 낳네

수면위에 맺힌 상像들이 중심을 껴안으며

억겁의 시간이 문을 여네

수수만 년 잠든 기억을 더듬어

가만히 말을 걸어오는 우유니 소금평원*

몸의 소용돌이를 안은 채 흰 구름이 지나가네

먼 지평선 밖으로 두 개의 태양이 지네

 

빛의 결가부좌위로

수많은 별자리들 첨벙첨벙 다가오네

얼음감옥에 갇혔던 슬픈 연대기를 거슬러 오르면

차고 푸른 바다가 있었네

조금씩 푸른바다를 메웠던 단단한 침묵 속

깊은 잠을 깨우는 부드러운 손길이

뚝 끊어진 물길 어디쯤 쓰다듬고 있을까

파랑을 품었던 물결무늬가 심해어처럼 살아오네

우기가 펼쳐든 신의 늑골 속 통점들이 환했네

 

 

3. 바람의 향기를 품다

                                                    이현서

눈물도 오래 가두면 꽃이 된다. 겨울

 

물병자리 남자가 무릎을 꿇는 시간, 바람은 분주히 시침을 돌리고

눈보라들은 사스레나무 숲으로 갔다 흰 수피의 나무들 몸속 심지를 돋운다

 

전생을 건너온 순백의 영혼들

속수무책 등고선을 오르는 술렁임의 난청 속에서도 먼 우주 밖 소리에 귀를 세우며

이름 모를 성좌의 기원을 짚어가고 있다

지금은 휘몰아치던 소용돌이를 잠재운 채

살얼음 진 허공의 음계를 밟고 꽃으로 돌아가는 시간

유목의 피들이 고요의 주술을 걸며 도드라진 잎맥을 새긴다

 

수직의 벼랑을 세워 만든 울음의 방

촉수 낮은 불빛을 따라

오래 떠돌던 그리움이 귀가한다

 

숭어리숭어리 환한 이마를 가진 당신

 

툭툭 끊어진 길 위로

아슴아슴 잎맥을 타고 오는 날숨은 그대를 향한 슬픈 고백이어서

그 나라에 닿기도 전에 속절없이 사라지는 운명이지만

 

나는 또 비탈길에서

우듬지 마다 시린 바람의 향기를 품는다

동공에 스민 눈물 한 점으로

 

 

4. 발화發話하는 봄

                                                    이현서

꿈에 매화를 보았습니다

검은 등걸에 핀 겹겹의 분홍

깊이를 모를 바닥에서 수신된 네 눈빛 속

얼어붙은 영혼이 빛의 과녁으로 터지는

 

훅 끼치는 살 내음

한순간 우주가 멈추어버린, 온 생을 흔들던 푸른 무덤 속

수수만년 순장된 통증의 그루터기에서

투명한 물소리가 들립니다

 

늑골 밑에서 울던 새 한 마리 꺼냅니다

젖은 부리의 시간이 구름무늬 경첩을 열면

가까스로 어둠의 중력에서 벗어난 날개를 퍼득입니다

붉은 새의 심장이 허공에 발자국을 찍습니다

 

오래 몸속을 떠도는 바람의 흐느낌처럼

꿈속에서도 멈출 수 없는 너를 향한 기도가

수 만개의 분홍으로 발화發話하는 봄

저 빛의 문장으로 내안의 등불을 켭니다

 

당신 없는 한 계절을 견딜 수 있을 것 같습니다

 

 

5. 안개도시

                                                    이현서

밤이면 해안선을 따라

바다는 스멀스멀 피어올랐습니다

발자국도 없이 밤을 건너는 샤먼의 영혼처럼

내밀한 비의를 감춘 습문들

출렁이는 마음의 장력이 허공을 거느립니다

 

흔적을 지우며 먼 곳에서 흘러왔을 물의 입자들이

때늦은 고백처럼

난해한 문장 속에서 울음을 꺼내면

밀입국한 후생이 삐걱 문을 열고

젖은 몸의 기척들이 자욱한 밤을 건너갑니다

 

우르르 지하로 몰려든 사람들

화려한 조명 아래에서도

눈먼 자들의 도시*로 이주 합니다

창백한 시선들이 수묵의 농담濃淡으로

몸속에 그림자를 가둡니다

 

습곡마다 달의 궤도를 이탈한 소리들을 만지며

혼자 우는 밤, 집요하게

젖은 영혼들이 서로에게 잊혀져가는 늪

파란 정맥을 타고 흐르던 연민이

어둠속에 풍장 되고 있습니다

 

 

6. 사월

                                                    이현서

천개의 눈물을 움켜쥔 하얀 민들레 씨앗이

비행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색色을 버린 겹겹의 슬픔이 아득히

바람의 보폭을 헤아리며 낯선 허공을 꿈꾸고 있습니다

보도블록 좁은 틈새에 납작 엎드려 지난겨울 내내

눈보라를 견디느라 금이 간 심장마다 통증의 기척들

쪼그린 채 울고 있는 어린 내가 헐거워집니다

 

대학병원 민들레병실에서 산소 호흡기에 기댄 그는

때 이른 이륙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가느다란 줄을 타고 흐르는 가쁜 호흡

불운을 운명처럼 안고 살던 생애가

슬픔의 각도로 기울어집니다 밀물진

유전자의 기억을 따라 집요하게 달라붙는 후회의 조각들

자욱히 깊어진 행간의 모서리마다 쌓이고 있습니다

속수무책 캄캄하게 허물어지는 어제가 모여

마침내 언젠가 당도해야 할

여기는 가깝고도 먼 이별의 안쪽

 

 

7. 그립다는 말

                                                    이현서

‘그립다’는 카톡이 날아들었다

쨍그랑, 수면이 깨지는 소리

벼랑을 타던 빼곡한 우울이 걷히고

파란 하늘이 내려오는

아무도 모르게 순장했던 빛들이 붉은 심장을 열고

맨발로 살아 돌아오는 길목

다시 세계의 중심이 되는 예감

젖은 문장을 꼭 움켜쥔 꽃잎들이

천 만평 꽃차례로 휘어지고 있다

 

 

8. 하현下弦

                                                    이현서

밤이면 내 몸속에 풀여치 한 마리 산다

층계 밑 구석진 곳에서 여린 날개 비비는 소리

가늘고 고운 울림으로 방 한 칸을 들이는 모양이다

긴 더듬이로 달빛을 찍어 문풍지를 바르고

외풍이 스미는 틈 사이엔

여문 추억을 꼭꼭 채워 넣는다

슬픔이 저장된 시린 악보를 타고

뼛속까지 스미는 한기

네게 닿을 듯 닿지 않는 긴 울음이

휘적휘적 밤의 허리를 휘감는다

참을 수 없는 허공의 무게를 견딘 날개가

풀섶에 내린 이슬에 젖곤 했다

찌- 찌르르 풀여치 울음소리 어둠을 타전하고

몇 번의 안부를 묻던 꽃향기 짙은 기억들

맨몸으로 이별의 하중을 가까스로 견딜 무렵

오래 함구하던 슬픔 위로

달이 무너진다

 

 

9. 그 집

                                                    이현서

푸른 시간이 한길 눈 속으로 파묻혔다

아득한 고립, 고요를 품은 파란만장의 무늬들 한 점 화폭 속으로 잠겼다

 

눈 시린 적막이 풀어 놓은 저문 연대기 속

습한 인연의 줄기만 집요하게 덩굴을 뻗어갔다

이따금 세상과 잇닿은 풍문이 바람벽에 매달리고

오래 서성이던 발자국이 모여 어둠을 뻐끔거리면

차마 부르지 못한 이름이 알 수 없는 슬픔으로 덜컹거렸다

 

찬바람이 집요하게 틈을 비집던 윗목에선

고구마가 은밀히 싹을 내밀고

주문처럼 외던 엄마의 기도가 발굴된 방

칸칸마다 몇 번의 묵은 계절이 다녀가고

담장 밖을 떠돌던 낡은 휘파람소리는 시간의 둥근무늬 속에 갇혔다

 

유성처럼 스러져버린 옛 모퉁이를 돌면

귓불이 붉은 소년의 첫눈 밟는 소리, 때늦은 귀가에

제 몸의 기억을 천천히 더듬으며

통증으로 번지는 깊은 골 그 집

 

 

10. 팔월의 한낮을 건너다

                                                    이현서

명옥헌 방지형 연못 위 검푸른 세월을 건너온 꽃잎 자욱합니다

 

파문으로 일렁이는 물컹한 슬픔의 빛

 

천년의 시간 안쪽 선연한 꿈속에서

두루마리처럼 풀리는 붉은 꽃의 해례본

몇 겹의 생을 부려 놓습니다

 

사랑은 뒤돌아보지 않는 거라며

켜켜히 쟁여둔 눈물 꾹꾹 삼키는 목백일홍 꽃잎들

흰 그림자를 안고 수면으로 자진하듯 몸을 던집니다

 

물속 허공으로 날아가는 붉은 나비

고백처럼 오랜 침묵을 깨웁니다

 

단 몇 줄로 요약된 문장을 위한

깊고 아득한 허공의 거리 그 아득한 늪

 

붉은 심장으로 쓴 핏빛 울음이 팔월의 한낮을 건너는 물의 집

 

모서리마다 쌓인 고백처럼 상한 영혼을 다독이며

바람은 끝없이 수신호를 보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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