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여백
HOME 문학콕 당신의 시
당신의 시 '황경식 시인'시노 외 9편
복지TV청주방송 | 승인 2019.07.12 14:04
 ▲ 황경식 시인

〔시인〕 황경식 시인

〔약력〕

* 경북 의성 출생

* 1994년 1월『현대시학』으로 등단

* 2001년 10월 시집 『실은, 누드가 된 유리컵』

  (문학세계사)

 

 

 

1. 시노詩奴

                                    황경식

몸을 팔아 시詩를 사는구나

헐값에 마구 팔아

시 한줄 사게 되는구나

노예가 되겠구나

온 몸에 가시거적 덮어쓰고

두 손 묶여 끌려가면서

입술에 붙은 노래 한, 두 구절

세상 눈 피해 황홀장단에 빠졌구나

붉은여우원숭이처럼 이 가지 저 가지

먼 하늘을 훨훨 날아다니는구나

 

 

2. 냉장고에 넣다

                                    황경식

철모르는 눈사람을 냉장고로 데려왔다

 

몰래 키울 작정이었다

무얼 먹일지 어떻게 말을 걸지는

생각해보지 않았다

 

가나다라를 불러줄까

천지현황을 소환해야하는지

 

꿈속에서 구조요청을 받은 것 같았다

눈사람도 꿈을 꾸고 있었는지

무엇을 채굴하던 중이었을까

 

하얀 절망으로 배를 채우고 있었다

 

 

3. 라라라,

                                    황경식

조금 피곤한 몸을 病室침대에 뉘였는데

침대가 둥실, 하늘로 떠올랐다

 

발밑엔 먹물 세월을 그냥 물고 있는

잿빛 석탑의 캠퍼스와

봉수대가 가까이 보이는 안산

남산 타워도 한쪽 팔을 뻗치면

손에 잡힐 것 같다

 

풀지 못한 많은 물음의 답이

어쩌면, 보일지도

 

타고 온 정든 배, 노를 놓아버리면

갈래갈래 묶인 끈도 풀리려나

 

허공에는 몽실한 구름 밭고랑이

라라라, 이어지고

무수한 몽상이 하얗게 피었다 지고

지상에는 기록적인 폭염과 배롱나무

저들만의 잔치가 벌어지고

 

나는 자꾸만 벽 쪽으로 몸을 밀었다

마치, 새로운 문이라도 열릴 것처럼,

 

 

4. 도플갱어*

                                    황경식

점점 무거워지는 몸을 달래려 산책을 나섰다

조심조심 산을 오르는데

몸속에 함께 가는 사람이 있다

 

마음이 주름투성이어서, 걸음을 옮기거나

숨 쉬기도 힘겨웠던

태어날 때부터 흰 머리인 무명시인

 

잡을 수 없는 저주받은 말에 홀려

설니雪泥의 꿈 바깥을 배회하다 무릎이 나가고

 

나 보다 먼저, 저리 다급하여 호흡을 삼키며

외눈박이 보법으로 비틀 비틀 같이 걷는다

 

*: 도플갱어(double gore): 같은 공간과 시간에서 자신과 똑같은 대상(환영)을 보는 현상.

 

 

5. 달이 먹다․日蝕

                                    황경식

몸과 몸 포개지며, 나의 해여

 

너를 그대로 먹을 수 없을까

온 누리 캄캄해질 때까지

 

부드러운 혀 내밀어

너를 삼키고

내안의 너가 자라, 金剛발톱 내밀며

 

무량 저쪽, 적막한 허공을 찢어버리고

낯선 눈 뜨는 둥근 시간 속으로

점점이 빛의 씨앗을 뿌리며

자유롭게 날아오를 수 있을까

 

 

6. 백열전구를 켜다

                                    황경식

머릿속에 백열전구가 켜졌어. 흰 노루처럼 구석으로 도망치는 어둠. 핏빛 개복숭아가 입술 두꺼운 곤충 같이 소리 없이 피어났어. 詩王의 나라일까. 저쪽 세상도 언뜻언뜻 비치고 또, 다른 내가 나를 보고 있었어. 감을 수도 뜰 수도 없어 눈은 돌로 변하고, 모든 것이 환하게 보였어. 껍질을 벗고 상처투성이 속살을 드러낸 길. 수많은 해가 날개를 치며 날아올랐어.

 

 

7. 파를 다듬듯이

                                    황경식

파를 다듬듯이

시를 만지다가 잠이 들었다

 

흙을 털고 뿌리를 도려내고

껍질을 벗기며

희디흰 알몸이 나올 때까지

눈을 감아도 피할 수 없었다

마약痲藥보다 매운 냄새

코를 찌르고

 

잠든 머리맡에 꿈결같이 놓인

시詩 한단

 

 

8. 역려逆旅

                                    황경식

하서회랑河西回廊* 먼 길 돌아가는 길이었을까. 어디에서 부서지고 떨어져 나왔는지 모른다. 말할 수 없는 힘에 팔다리가 묶여 뛰어 내리지도, 비명을 지르지도 못했다. 턱이 돌아가고 눈앞이 깜깜해졌다. 악몽을 꾼 것 같았다. 이리저리 밀려다니다 뼈 한 조각 내밀지 못하고. . . 울음 우는 산을 넘어 함께 비빌 등을 그리며 한줌, 한줌 날려갔다.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 삶. 마음보다 얼굴이 먼저 깨져 둥근 점, 점을 이루었다.

 

마비된 뺨이 되어 어느 시멘트벽에 달라붙어 있어도 누가 돌아보지도 않았다.

 

둔황의 외진 뒷골목 낡은 여관 담벼락, 찢겨진 포스터에 어깨를 기댄 한물간 가수처럼, 공허한 입을 벌렸다. 노래대신 모래가 틈 사이로 흘러내리고. . .

 

*하서회랑: 중국 간쑤성[甘肅省] 서부, 치롄[祁連]산맥 북록에 동서로 이어져 있는 오아시스 지대. 우웨이[武威]·장예[張掖]·주취안[酒泉]·둔황[敦煌] 등의 오아시스 도시가 있는 대상(帶狀) 지대로 예로부터 톈산로[天山路]로 이어지는 동서교류의 요지로 중요시되었다

 

 

9. 빈 서랍

                                    황경식

서랍을 문득 비워버렸다. 걸치고 있던 체면이랑 기억의 일부, 통장과 신발 따위도 모두 버렸다. 몸에 익은 말들과 윙크 따위를 함께 보따리에 쌌다. 남자사용 설명서도 없앴다. 빈 공간이 점점 깊어져 무한으로 연결되는 듯했다. 시 한편 담기에는 너무 큰 여백이었다. 여기저기 미로 속으로 떨어지는 팥배나무 잎사귀들. 머릿속에서도 딸꾹질이 일어나며 몇 개의 서랍이 비워졌다.

 

초대받지 않은 손님도 있었다. 상암동 MBC가는 길목에 이구아나가 나타난 것이다. 화면을 찢고 튀어나온 무성영화 주인공 같았다.

그가 갑자기 사라졌다. 소리도 없었고 소문도 없었다. 미련이 미련을 탐식하듯 아무런 흔적을 남기지 않았다. 사람들은 그가 서랍 속으로 들어갔다 했다. 움츠린 어깨 그림자만 빈 나뭇가지에 걸려 있었다.

앞도 뒤도 없는 망망 서랍의 끝 너머, 우리는 어디에서 어떤 모습으로 다시 만날까.

 

 

10. 신촌

                                    황경식

귀를 잠시 빌려주신다면, 세브란스 병원에서 신촌 로터리로 가는 짧은 지하도에서였다. 무너지는 잇몸처럼 마음이 허해지며 맞은편에서 백색 가면이 걸어와 지나쳤다. 잘못 본 것 같아 뒤돌아, 쫓아가 다시 보고 싶었지만 가면은 멀리 사라지고 곧 지하도 바깥이었다. 절벽에서 피가 쏟아지듯 빛의 폭포가 잠시 눈을 찡그리게 했다. 출구가 점점 멀어지는 방에 들어선 것 같았다.

 

병신년 신정한파로 거리는 아주 인적이 드물었는데 또 가면이 걸어오고 있었다. 그 다음에도 많은 이야기를 생략한 面具*, 그리고 다시 검은 마스크를 쓴 탈이 다가왔다. 오토바이를 타고 탈탈탈 지나가는 가면도 있었다. 밤새 詩鬼에 쫓기다 양철 배수관을 타고 올라온 것 같은 정체불명의 가면이 현대 백화점 별관, 유 플렉스 건물 외벽 광고판 위에서 비린 웃음을 흘리고 있었다.

 

발목이 삐끗하며, 썰물처럼 몸속에서 꿈뭉치 같은 것이 빠져나갔다. 하마터면 팔을 떨어뜨릴 뻔 했다. 다리가 문득 없어지거나 허리가 생략되고 눈알이 모두 사라진 얼굴도 횡행했다. 할로윈데이의 한 페이지가 잘못 뜯겨져 나왔는지도 모르겠다. 나는 누구인가. 쥔인가, 쥐인가, 쥐였을까, 누구에겐가 물어보고 싶었다. 거지중천**에 창백한 노래 한 구절처럼 비린 낮달이 떠있었다.

 

걸음을 재촉하여 신촌지하철로 향하는데 홍익문고 옆 유리벽 건물에서 가면이 벗겨진 맨얼굴이 노려보았다. 블루 비뇨기과 네온 간판이 오래전 절판된 시집같이 깜박거렸다. 빈 하늘을 날아가던 새들이 뒤를 돌아보았다. 생생한 푸른 오이 같은 것이 몸속에 박혀버렸다. 빅뱅이 일어나고 수많은 별이 태어나, 흩어졌다. 지하철 지하도로 마트료시카 인형들처럼 가면이 쏟아져 들어가고, 나왔다.

 

*면구(面具)[면ː구][명사] [같은 말] 탈1( 얼굴을 감추거나 달리 꾸미기 위하여 나무, 종이, 흙 따위로 만들어 얼굴에 쓰는 물건). 가면

**거지중천 (居之中天):[명사] [같은 말] 허공( 텅 빈 공중).

webmaster@ccwtv.kr

<저작권자 © 복지TV청주방송,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복지TV청주방송의 다른기사 보기
icon인기기사
기사 댓글 0
전체보기
첫번째 댓글을 남겨주세요.
여백
여백
신문사소개기사제보보도요청광고문의불편신고개인정보취급방침청소년보호정책이메일무단수집거부
충북 청주시 흥덕구 1순환로 581-0(봉명1동 892번지)  |  대표전화 : 043-268-4441  |  팩스 : 043-268-4009 / 043-278-4441
등록번호 : 충북아00159  |  등록년월일: 2015년04월23일  |  통신판매업신고 : 제 2018-충북청주-0260 호
청소년보호책임자 : 이용범  |  발행인/편집인 : 박용동
복지tv충청방송의 기사를 무단 전재 · 복사 · 배포 등을 금하며 이를 어길 시 저작권법에 저촉됨을 알려드립니다
Copyright © 2019 복지TV청주방송. All rights reserved.
Back to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