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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시 '정선희'알을 갖고 노는 일 외 9편
복지TV청주방송 | 승인 2019.06.25 09:20
▲ 정선희 시인

[시인] 정선희

[약력]

* 1969년 경남 진주 출생

* 2012년 『문학과의식』, 2013년 『강원일보』 신춘문예로 등단

* 시집 『푸른 빛이 걸어왔다』

 

 

 

 

 

 

1. 알을 갖고 노는 일

                                    정선희

너무 세게 쳐도 안 되고

너무 약하게 쳐도 안 되는

이쪽에서 저쪽으로

손가락을 넘기는 일

 

놓치면 안 돼

미끄러져도 안 돼

다이가 비좁다고

뛰어다니는 알

통통통통

종종걸음을 치는 알

 

깨지면 어쩌나

날아가면 어쩌나

저렇게 연약하고

보얀 알을 때리는 사람은

강심장의 소유자

 

왼손에 알 하나를 쥐고

호주머니에 알 하나를 넣고

나는 조심스러운 사람이 되고

 

탁구를 치는 건

생각을 갖고 노는 일

이리 저리 흩어진 생각을

새알로 빚어

가볍게 탁, 탁,

 

 

생각은 날아가다

새가 되고

알은 뛰어가다

공이 되고

나는 조심스럽게

알을 낳는 사람이 되고

 

2. 슬픈 노래와 밥통

                                    정선희

어떤 음악을 들으면 소화가 안 된다고 하면

너는 뭐라고 할까

말도 안 되는 소리에요

슬픈 노래를 들으면

심장 박동이 느려지고

위가 딱딱해지지

노래가 횡경막에 걸려

음식물이 내려가는 것을 막고 있어

그렇게 말하면 너는 웃겠지

너는 모르지

슬픔에만 반응하는 내장기관이 있다는 것을,

웃음은 내가 살기 위한 방편

얼굴 근육이 위에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한의학 공부를 하면서 알게 되었지

위 경락은 눈 밑에서부터 시작되기 때문에

눈물을 흘리고 나면

아무것도 먹고 싶지 않은 것,

슬픔이 가는 길과

음식물이 통과하는 길은

다르지 않지

장례식장에 가서

밥을 못 먹는 것도

슬픈 영화를 보고 나서

밥맛이 뚝 떨어지는 것도,

괜히 그러는 게 아냐

음악은 물수제비처럼

슬픔을 건드리고 지나가지

도 레 미 파 솔

물수제비가 지나간 자리는

금방 사라지겠지만

물속에 가라앉은 돌멩이는 횡경막 어디에서

또 다른 슬픔을 불러들이곤 하지

 

3. 노근(老斤)리는 녹은(綠隱)리

                                    정선희

동그라미와 세모가 있어 심심하지 않아 가끔씩 나비가 날아와 외롭지 않아 겹겹이 덧칠한 자국들이 있어 춥지 않아 자주 기차가 화면을 지우는 바람에 악몽에 시달리지 않아 동그라미 속 자국들을 손끝으로 어루만지자 코끝으로 전해지는 화약 냄새, 세모에 눈을 맞추자 눈동자로 전해지는 풍경, 동그라미와 세모에 입김을 불어넣자, 빗방울이 떨어진다 빗방울은 핏빛이 되고 찰칵, 사진을 찍는데 후두둑 무릎이 꺾인다 두 팔을 벌리자 내 손바닥으로 옮겨 앉는 자국들, 동그라미가 아프고 세모가 아프다 노근리에 더 이상 녹은리는 없고 비명소리 대신 기적소리만 요란하다

 

4. 다리 속의 나무

                                    정선희

다리 속에 나무가 살고 있어

밤이 되면

더욱 무성해지는 나무

초록을 부풀리고 있어

세력을 확장하고 있어

손으로 더듬으면

숨을 쉬는 나무

강물 속 구름처럼

정지화면으로 흘러가고 있어

물구나무를 서면

사람도 나무

머리는 뿌리

팔 다리는 가지

머리를 감는 것은

뿌리에 물을 주는 행위

팔 다리를 움직이는 건

바람을 올리는 행위

다리 속에 나무가 살고 있어

자꾸만 가지를 뻗치는 나무

음지에서 양지쪽으로

손을 내미는 나무

의사는 순환장애라고 하지만

나무의 속성 때문이야

예전에는 아이가 태어나면

한 그루 나무를 심었지

사람도 나무라는 걸

잊지 말라는 뜻,

내 속에 나무가 살고 있어

무성해지면 피부를

뚫고 나오는 나무,

내가 나무라는 걸

시퍼렇게 증명하는 나무

 

5. 백회

                                    정선희

백 가지의 기운이 모이지 가만히 보고 있으면 짙푸른 소의 물처럼 강하게 모여드는 기운들이 보일 거야 겉으로는 조용한 듯, 안으로 힘찬 회오리, 소의 물속에 나뭇가지를 집어넣으면 안으로 빨려 들어가듯, 범상치 않은 기운이 맴돌고 있어, 그곳에 가마가 생기는 것도, 가마가 새집처럼 원을 그리는 것도 기의 자기장 때문, 스트레스를 많이 받을 때 원형탈모가 일어나는 것도, 흥분할 때 그곳이 뜨거워지는 것도 같은 이치, 뚜껑 열린다는 말은 압력을 견디다 못해 터질 수 있다는 말, 도 닦는 스님들을 보면 그곳이 유난히 솟아 있는 사람이 많아, 기가 강하게 뭉쳐 세상과 타협하지 않겠다는 말, 밤에 잠이 오지 않을 때 도깨비 방망이로 그곳을 두드리지 토닥토닥, 뭉친 기운을 흩어주는 거지, 비 오는 날 그곳에 뜸을 뜨는 건 밑으로 가라앉은 기운을 끌어올리는 것, 이런 봄날 내 정수리엔 꽃잎들이 회오리를 치지

 

6. 검은 비닐봉다리가 열리는 집

                                    정선희

검은 비닐봉지를 뒤집어쓴 물건들이 수국처럼 펼쳐진 그 집은

물건이 한길까지 나와서 손님을 맞는 그 집은

뽀얀 먼지 톡톡 바르고 부옇게 웃는 그 집은

중앙시장 골목 맨 안쪽에 있다

 

부처님도 있고

산신령님도 있고

옥황상제도 있는 그 집은

동양 귀신도 있고

서양 귀신도 있고

출입문이 없어 물건들이

손님을 고르는 그 집은,

검은 봉다리가 이삿짐처럼 쌓여 있고

손님이 와도 앉을 자리가 없고

천장까지 쌓인 물건들 때문에

얼굴이 안 보이는 그 집은

새것도 오자마자 헌것이 되는 그 집은,

 

정신 줄 똑바로 박힌 사람도

반쯤 정신 줄 놓고 가는 그 집

한 번 가면 또 가게 되고

스님도 오고 무당도 오고 보살도 오고

기다림으로 망부석이 된 그 집

젊은 여자가 늙은 여자가 되는 그 집

아는 사람도 모르는 사람이 되고

작년보다 10년 전이 더 가까운 그 집

곧 이사 갈 듯 포장이 끝난 그 집은

어제도 못 가고 오늘도 못 가고

내일도 못 갈 그 집은,

 

7. 사진 찍는 집

                                    정선희

문이 열릴 때마다

그곳엔 눈이 내리고

벚꽃이 피어나지

 

눈 한번 깜박이면

낮에도 달밤을 데려오고

밤에도 무지개를 피워내곤 하지

 

문을 열고 닫는 것으로

계절은 봄에서 겨울로 가고

가을 지나 여름이 오기도 하지

 

기다리는 게 일이 되어버린 주인은

유리창에 붙은 사진처럼 빛바랜 얼굴

사진 속 벤치에 구름이 우산을 씌운 표정,

 

도시의 한가운데서

보름달은 가로등이 되고

하수도는 계곡 물소리로 흐르는데,

 

문이 닫힐 때마다

그곳엔 눈이 그치고

벚꽃은 더 이상 꽃을 피우지 않네

 

하루에도 몇 번씩

다른 계절을 살다 가는 주인은

더 빨리 나이를 먹고

미래의 옷을 입고

현재에서 과거로 출근한다네

 

8. 얼치기냉면역

                                    정선희

기차역이 있던 곳에 얼치기 냉면집이 들어섰다

냉면집 사장은 추억을 팔아 돈을 버는 사람,

추억 한 그릇에 9천 원이면

그리 싼 것도 비싼 것도 아냐

사람들은 기차역을 둘러보러 왔다가

코스모스 한번 쳐다보고

흰구름 한번 쳐다보고

괜히 허전해져서

냉면 한 그릇 먹고 간다

코스모스는 흔들리면서 매달리는데

구름은 무심한 표정,

철로는 걷어차도 끄떡도 하지 않아

기차역과 냉면집은 무슨 상관이 있나

그 많은 사연과 슬픔을 퉁치고

들어선 얼치기 냉면집,

그곳에서 누군가는 첫눈에 반하고

그곳에서 누군가는 아이를 만들고

누군가는 고무신을 거꾸로 신었는데

밤기차는 감정의 소모품,

목포로 가는 0시행 완행열차

노래 속 주인공이 되기 위해

나는 기를 쓰곤 했지

기차는 밤새도록 달리고

유리창은 지웠다 썼다를 반복하면서

있는 애인도 버리고

없는 애인도 버리고

기차역과 냉면집은 무슨 상관이 있나

목포로 가는 완행열차는 언제 돌아오나

 

9. 버드나무 밑에 닭

                                    정선희

문 앞에 두는 게 아냐

손님을 쫓아

부리가 문 쪽을 보고 있어

위에서 아래로 콕콕,

어디로 옮길까요?

한복판이 좋겠군

움직이는 반경이 넓어질 테니까

자리를 바꾼다

버드나무 밑의 닭은

닭이 아니라 봉황이야

사람들이 닭을 우러러 본다

저 그림 멋진데?

문 앞에 있을 때는

보이지 않았던 것처럼

닭에게 경의를 표한다

누가 그린 거야?

너를 보고 그린 거니?

닭은 나를 보는 듯

너를 보고 있어

자신을 본다고 착각하게 만드는 닭

바람둥이 기질이 있어

눈동자가 반짝이는 닭

잘못 본 것일까

고개를 돌리는 순간

윙크를 하는 닭,

어쩌다 나는 닭이 되었을까

기어이 버드나무 아래로 들어간다

닭이 붉은 벼슬을 흔들며 나를 덮친다

 

10. 단디

                                    정선희

전라도에 ‘거시기’가 있다면

경상도에는 ‘단디’가 있지

 

‘단디’는

약방의 감초처럼 쓸 수 있는 말

 

사과를 깎다가 손을 베어도 ‘단디 안 하고’

컴퓨터 자격시험을 보러 간다 해도 ‘단디 해라’

남자에게 차였다 해도 ‘단디 좀 하지’

주차하다가 남의 차를 들이받아도 ‘단디 해라 캐도’

 

‘단디’라는 말 속에는

마디가 많아

할 말이 너무 많아서

한 마디로 끝내버리는 말

 

최소한의 단어로

최대한의 효과를 주는 ‘단디’

상황에 따라 서술어가 달라지지

 

액세서리처럼 예쁘지만

몸을 지키는 은장도처럼

요긴하게 쓰이는 ‘단디’

 

안쪽 호주머니에 비상금처럼 넣어 두었다가

꼭 필요할 때 꺼내 쓰고 싶은 ‘단디’

 

‘단디’는 단단히도 아니고

똑바로도 아니고

잘도 아니고

그 모든 것이기도 하지

 

외국어 같기도 하고

어떤 말의 약자 같기도 한

‘단디’

부싯돌 같아서

내 가슴에 불을 붙이고 싶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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