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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시 '김경식 시인'적막한 말 외 9편
복지TV청주방송 | 승인 2019.06.14 16:18
▲ 김경식 시인

[시인] 김경식 시인

[약력]

* 충북 보은 출생

* 스토리문학》(수필), 《다시올문학》(시) 신인상

* 다시올문학상, 부천예술공로상 수상

* 계간《다시올문학》주간

* 보은문학회, 부천문인협회. 전망 동인, 풍향계 동인

* 수상집 『마음에 걸린 풍경 하나』

* 시집 『적막한 말』

 

1. 적막한 말

                                         김경식

다음에 보자.

악수를 나누고 돌아서는데

문득 눈앞이 캄캄해진다

 

동백에서 산국山菊까지 빠르게 한 순번 돌고 나면

이내 눈발이 치고

세상의 길은 모두 사라져 버릴 것을

 

내주 혹은 내달 언제

따로 날을 정하지 않았으니

어쩌면 오늘이 우리의 마지막이었을 터

 

다음에, 그 말씀은

이승의 시간 다 흐른 뒤에

열명길 함께 나서자는 서러운 약속이겠거니

 

이러한 때

사전 속의 유의어 사후事後는

사후死後로 읽어야 하는 법이다

 

2. 산사山寺의 하루

                                         김경식

비벼 먹은 그릇에 물을 부어 들이켠다

이제 중이 다 되었다고 아내가 눈을 흘긴다

허어 웃다가 테두리에 들러붙은 밥풀을 핥는 때

배추김치 한 쪽을 슬쩍 내밀며 산엔 언제 들어가느냐 묻는다

 

아내여

내게는 하루의 노동과

세 끼 밥이 모두 산중의 일이라네

종일 사람의 밭에 나가 울력을 하고 돌아오면

욕실에서 힘겹게 낡은 피부 한 장을 벗겨내고

깨끗하게 한 공기 밥을 비우고

빈 그릇을 다시 비우고

경전 말씀인 양 시 몇 줄 또 썼다 지우면

덧없이 하루는 저무는 것

 

나중에 해가 짧아져서

궁상맞은 이 그림자까지 마저 지우고 나면

이승의 소임所任은 끝나는 것이니

그때까지만,

모르는 체 눈감아 주게

 

3. 입동立冬 즈음

                                         김경식

​ 시리고 아파 병원에 갔더니 잇몸 뼈가 녹아 사라졌다 한다. 어금니 몇 개 뿌리를 잃고 무른 살 위에 망연히 앉아 있다

 

밥상 가득한 아내의 수고는 이제 쓸모가 없다. 뼈를 이식하고 이를 새로 해 넣을 때까지 차 한 잔의 약속도 저만큼 끼니때를 비켜서 잡아야 한다

 

나는 지금 허방 위에 서 있는 셈이다

언뜻 균형을 잃거나 한 걸음 잘못 내딛으면 저 깊은 나락으로 떨어질 터

 

씹을 수 없는 아침,

맹물에 만 한 주걱의 밥을

조심스레 목구멍에 밀어 넣고

 

생기를 잃어버린 지 오래

우수수 잎이 지는 정원의 나무들 곁에 서서

 

바람 들까 볏짚으로 밑동을 싸고 그의 뿌리 단단히 밟아주는 것이다

 

4. 깊은 밖

                                         김경식

남녘에서 꽃 소식이 들려온 아침

빈 가지에 앉았던 겨울새가 화들짝

공중으로 솟구친다

앞선 놈이 톡 톡 허공 문을 열자

새들은 열 지어 밖으로 사라진다

 

저 밖은 얼마나 깊은 것인지

종일토록 기다려도 떠오르지 않는다

 

깊다는 것은 안의 상태를 이르는 말이지만

나이 들면서 깊은 밖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발자국 소리도 귀에 익어서

언짢은 일을 당하셨는지

신선의 술 한 잔 얻어 드셨는지

알 만치 되었다 하면

문득 문을 열고 나가 돌아오지 않았다

 

계절이 가고 오고

바람이 방향을 바꿀 때마다

이웃의 이름과 낯익은 풍경들이

줄줄이 빠져 나가고

재빠르게 문이 닫힌다

 

안으로는 결코 열리지 않는

저 문 밖에

바다보다 무량한

세상이 있다

 

5. 간월암看月庵 가는 길

                                         김경식

달 보러 간다

물 나간 바다 건너

뵈지 않는 천만 겹의 파도를 넘어

한 걸음 더 가까이

달빛 속으로 간다

 

겁劫 겁劫 무량無量한 세월

가부좌跏趺坐 틀고 있는

나무 보살菩薩

법의法衣 낡은 자락 아래

꿇고 앉은 그림자들

 

세상일은 나 몰라라

비겁하게

비겁하게

그 속에 숨어

극락왕생極樂往生 빌고 있는

나를 잡으러 간다

 

이생 다시는 얼씬대지 못하게

멀고 먼 부처 꽁꽁

묶으러 간다

 

6. 간間

                                         김경식

둑과 둑 사이 강물이 흐른다

한 쪽 둑이 무너지면 강은 이내 공간 밖으로 달아난다

그때와 이때 사이,

그때 혹은 이때를 지워 버린다면 시간은 일절 흐르지 않는 것이 된다

흐드러진 봄날

꽃 이파리 몇 장을 떼어 내자 홀연 그대가 사라져 버렸다

텅 빈 시간과 흐르지 않는 공간

애초 그대는 먼 전생의 그림자였거나 혹은 몇 억 광년 뒤에서 달려오는 도중일 것이다

먼 그대와 더 먼 그대 사이에 나는 서 있다

 

7. 카페 포크웨이즈. 1

                                         김경식

김포金浦의 논들은 날마다 한 마지기 제 허벅살을 도려서 도시의 바람에게 넘겨주었다. 웅덩이를 메우고 거푸집을 짓기 위해 산은 또 제 팔과 다리를 뚝뚝 분질렀다

 

거역할 수 없는 일이었다. 쉰 몇 해 깊이 박힌 뿌리를 끊고 그가 훌훌 떠났을 때도 나는 바람에 결박당한 채, 도시에서 건너온 불빛에 속살 허옇게 드러내 놓은 겨울 산을 망연히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가랑잎이 일제히 부르르 몸을 떨었다. 숲 어딘가에서 다시 한 그루의 나무가 스스로를 톱질하고 있을 것이다. 들 끝을 서성이던 해가 갑작스레 피를 토하기 시작했다

 

억새가 소스라쳐 서로의 어깨를 부둥켜안고 겨울새들은 여느 때처럼 논바닥으로 우수수 떨어져 내렸다. 익숙하게 길은 어둠 속으로 스며들었다

 

번번이 이렇게 그에게로 가는 길을 잃어버렸다. 어디로 흐르는지 어디에서 닻을 내리는지, 우리는 뿔뿔이 혼자 떠돌고 있었다

 

 

8. 만행萬行

                                         김경식

길은 꼭 한 발짝씩 앞서간다

그 끝은 어디일까 뒤를 따라나서면 이 골목 저 골목 날쌔게 달아나고 빠른 걸음으로 따라잡을라치면 훌쩍 풀숲으로 뛰어들어 종적을 감춘다.​

잡목 숲의 무성한 가지를 헤치고 산길을 들어서면 길은 또 한 걸음 앞서서 하늘로 날아오르고

더 이상 달아날 곳이 없는 봉우리에 서면 산은 넌지시 처음으로 돌아가는 길을 보여준다

길,

아무도 그 끝을 본 사람이 없다

 

9. 담쟁이

                                         김경식

열려 있는 문은 없다

 

건조한 도시 풍경을 위해

집집마다 하나씩 그려 넣었을 뿐

 

문은 벽壁의 다른 이름이다

열린 적이 없으므로

 

꽃향기는 울안에서 시들고

하릴없이 골목을 떠도는 바람

 

유령처럼 떠올랐다

서둘러 벽 속으로 사라지는

 

얼굴 없는 그림자 행적을 쫓아

벽을 타고 오를 때

 

문은 다시 퍼렇게 녹이 슬고

 

10. 폭포瀑布                                        

                                         김경식

굴러야 해

 

무르팍 깨어지고 발목뼈 어그러져도

굴러야 해 상처가 아물면 더 큰 힘이 솟는 거야 자갈길이나 직각의 모서리,

한 길 넘는 바위도 굴러

굴러서 넘어야 해

 

지나치게 진지할 필요는 없어

한 번 지나치면 그뿐 다시 돌아올 수 없는 시간

거볍게 튀어 올라 몇 차례의 공중회전

고공 낙하의 공포 앞에서 최대한 뻔뻔스럽게

 

굴려야 해 오래된 전설과 흐르지 않는 절벽,

바위 위에서 낭떠러지를 굴리고 수직으로 떨어지던 절망의 흔적을 굴리고

대대로 유전하는 추락의 트라우마

날려버려야 해

 

바다에 닿으려면 본디

저의 빛깔로 천 년 만 년

시퍼렇게 살아 있으려면

두 눈 부릅뜨고

굴러야 해

 

굴려야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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