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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시 '강애란 시인'아버지의 탯줄 외 9편
복지TV청주방송 | 승인 2019.05.14 10:02
▲ 강애란 시인

[시인] 강애란 시인

[약력]

* 서울 출생

* 2001년 문예운동 시인 등단

* 시원문학회 회원

 

 

 

 

 

1. 아버지의 탯줄

                                               강애란

누가 거두지 않으니

탯줄 끊지 못하고 검붉게 말라가는 고추밭

늦가을 햇볕 바라기 붉은 감나무밭을 지나

콤바인 바퀴 자국 길게 남은 들판을 지나갈 때

마른 바람 한 줄기 저들 속으로 숨어든다

 

멀고 환한 창공 너머로 오래된 사람들과 풍경들

슬픔 없이 돌아봐도 이젠 흐려지는 기억들이다

 

오늘도 군더더기 없이 제 길을 건너가는 둥근 해

그 저녁노을 우두커니 바라보다

평생 말없이 살다 미수(88세)에 돌아가신 아버지 생각난다

구름장 너머 언뜻 보이는 아버지, 뒤늦게 가슴 친다

바람 한 줄기 차갑게 내 등을 후려치듯 훑어낸다

 

어머니보다 아버지의 탯줄이 그리운 11월이다

 

2. 정박하는 시간

                                               강애란

바닷가 간이 탁자 위에

카메라를 올려놓고

기우는 해를 홀로 바라보는

노년의 남자

회 한 접시에 소줏병 기울이면서

 

멀리 빨간 등대에 불이 켜지려면

소주 몇 잔은 더 비워야 할 것이다

 

한 폭의 풍경화를 이쪽에서 바라보며

같은 듯 다른 공간 속에 내가 서있다

갈매기 떼 밀어내며 바다의 시간이 흐르고

또 하루가 닫힌다

 

삼천포 시장에서

바다 냄새 싱싱한 파래와 물미역, 톳을 사들고

돌아가는 중이다 집으로

 

3. 대전 현충사에서

                                               강애란

찬 비석 앞에

저기 하얀 국화꽃 한 다발 내려놓고

그림처럼 서 있는 여인

 

아들일까

남편일까

누구일까

 

찬 비석들 사이

잿빛 어깨 반듯하게 세우고

여인을 바라보는 나라사랑 영혼이여

 

4. 삼천포 갈매기

                                               강애란

두 다리 먼저 덧없는 허공에서 내려와
차가운 뱃전에 닿아야 한다
하얀 날개도 잿빛 날개도
퍼덕거림 없이 가지런히 접어야 한다

날개 속으로 접혀 들어간 시간들
울음의 아우성과
남보다 빠르게 먹잇감을 낚아채야만 하는
고달픈 삶
발가락에 주름으로 남은 시간의 그림자
오늘밤은 깃털 속에 숨어있으라

별이 뜬다
잠시 뱃전에 내려앉아
내일을 향해 하룻밤 날개를 접었을 뿐이다

 

5. 철새들

                                               강애란

간척지 빈 들판에

허수아비도 다 살아버린 저 들에

떼 지어 날아든 철새 와글와글거린다

가을걷이 끝난 논바닥에

추억할 따듯한 싸라기라도 흩어져 있는지

 

문득 줄지어 날아오르는 새 떼

빈들에 떠 있는 꿈꾸는 해를 향해서

천천히 줄 바꿔가며 꾸룩꾸룩 날아간다

 

싸라기 쪼아대던 악착스런 부리로

찢겨진 서로의 깃털 알뜰히 고르다

속 깊은 곳에

뜻 모를 더운 생명을 심고 돌아가리라

깃털 같은 한 철 머물다 간다 해도

 

6. 운 명

                                               강애란

어디까지 가느냐

낯선 노인들끼리 묻는다

 

익산까지 간다느니

강경까지 간다느니

거기가 어디쯤이냐 묻고

누가 먼저 내리느냐 묻고

서로 모른다고

허허 웃는 노인들

굵게 잡힌 주름살 둥글둥글 펴진다

 

호남선 승차권이

주머니 속에서 소리없이 웃는다

 

7. 소문난 쭈꾸미 식당에서

                                               강애란

살아있는 쭈꾸미 건드렸다

먹물 튀었다

조그만 대머리 속에 하얀 알들 품고

시커멓게 반항 하다니

채소더미 속에서 귀여운 발들

돌돌 말았다가 쭈욱 쭉 내뻗다가

한순간 가지런해지는

살덩이 한 줌

감히 죽음의 문턱에서 발길질이라니

탱탱하게 부풀어 오른 반질한 대머리

뜨거운 숨 푹 쉬게 하리라

젓가락으로 구멍 뚫고 기다리는데

까맣게 잊고 떠나겠노라

반성의 검은 눈물까지 주룩 흘리는

말랑말랑하던 쭈꾸미 녀석

 

삶이란 어림없는 반항도 하고

잘 살아보겠노라 발길질 하다보면

맛있다고 소문난 이 세상도

녀석처럼 까맣게 잊고 떠나가야 하는 것인데

 

8. 섬

                                               강애란

여기까지 내려왔다

가는 곳마다 낯선 섬들이 많아

섬의 뒷편에서

들키지 않게 머물다 때 되면

슬그머니 떠난 시간들

 

섬은 어디에나 있고

섬은 눈높이만큼만 보여주고

태어나 온몸을 드러낸 적 없고

밝으나 어두우나 늘 눈물이 그득하다

 

어떤 섬은

가슴 속에 태어나 그 눈물을 혼자 다 삼킨다

 

9. 11월 햇살

                                               강애란

빈 공원에

빈 의자에

빈 가지에

늦은 오후 햇살이 시를 쓴다

어디론가 흐르기 시작하는 기억들을 노랗게 비추는 햇살

은행나무 젖은 가슴에 둥근 줄 하나 깊게 새기고 있다

그립다고 너에게 갈 수도 없고 너는 다가오지 않고

아무도 알 수 없는 남은 시간,

능선에 걸린 붉은 노을빛으로 넌지시 읽어볼 뿐이다

 

깁스한 오른발을 절며 자동판매기 캔커피를 꺼내는 여자

왼쪽 가슴으로 퍼지는 따끈함을 느끼며

먼 곳으로 흘러가던 기억을 붕대 감 듯 하얗게 거두고

짧은 햇살이 시를 쓰는 공간에 앉았다 가는 여자

절룩거리며 걸어온 시간의 그림자가 빈 가지에 걸려있다

그 가벼움을 펼쳐보는 여자

그 가벼움에 진저리 치는 여자

그 가벼움을 품에 끌어안는 여자

 

10. 바람 술 달빛 술

                                               강애란

바람 술에

달빛 술에 취해
언덕길 오르다 비틀거린다
담장에 부딪히며 올라간다
비틀거리며 올라간다는 것은
시간이 흐른다는 것과
나이 든다는 것과 얼마나 가까운 사이일까

수십 년 함께 살아간다는 것은
눈치껏 서로의 의미를 다 안다는 사이일까

산등성이 위로 떠오르는 보름달

호들갑스런 탄성은 위법이다
취한 듯 낮은 목소리로 가슴으로 열어라
잊혀지지 않는 기억들

손톱 끝에 봉숭아 꽃물 같은 그리움
혼자만 취할 수 있는 별빛 같은 공간

오래된 서랍속의 사진들이다

바람 술 달빛 술에서 깨어나면

바람처럼 불현 듯 사라질까

달빛처럼 검은 구름 속으로 숨어버릴까

바람 술에

달빛 술에 취해

비틀거리며 내려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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