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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시 '최양순 시인'백일동안 붉다 외 9편
복지TV청주방송 | 승인 2019.05.07 09:13

 

 

▲최양순 시인

[시인] 최양순

[약력]

충남 당진출생

2013년 시인정신 등단

공간시 낭독회 상임시인

 

 

 

 

 

 

1. 백일동안 붉다

                                          최양순

배롱나무꽃 피었다

 

백날의 노을을 삼킨 나무의 땅그늘이 붉다

꽃 진자리 찬바람이 머물고

옛이야기같은

아버지의 신앙이 살아난다

 

"머지않아 햅쌀밥을 먹겠구나"

 

딱 맞는 예언처럼

들녘은 온통 황금빛이다

 

2. 시인의 목소리

                                          최양순

엄마!

구름이 물속으로 들어갔어요

하늘이 땅으로 이사왔나봐요

우리가 아린이네 옆으로 이사 온 것처럼요

 

시인모임에 가던 중 들은

이 한 편의 시 같은 아이의 음성

 

물웅덩이에 마음을 빼앗긴

아이 옆에 앉아

땅으로 이사 온 하늘을 읽었습니다

아이의 음성따라 구름이

동당동당 흐릅니다

 

병아리처럼 예쁜 꼬마시인

이웃에 삽니다

 

3. 기다림이라 말하지 않는다

                                          최양순

떠나거나 돌아가야 할 곳이 있다면

능내역에 대한 기억은 지워야 한다

기차의 울음을 삼켜버린 그곳

빈 의자 서너 개 역사 문 밖에서 졸고

빛바랜 사진 몇장 후일담처럼 걸려있다

 

휑한 바람이 배경이 되는 거기

허공에 사선을 긋는 몸짓에는

슬픈 이름을 붙이지 말자

가령, 낙엽이라던가

낙화라던가

바람결에 쫒기는 빗줄기라던가

그냥, 유려한 몸짓이라 말하자

 

갈증처럼 번지는 기억속에 떠오르는 이름 있거든

휘파람을 가장하여

되뇌어 보자

비록 그 사람이 능내역에서

마지막 기차를 타고 떠난 사람이 아닐지라도

 

폐역에서는 우두커니 서 있어도

기다림이라 말하지 않는다

변명처럼 들릴지라도

그것은 마디게 잊는다는 번역어이기 때문이다

 

4. 그 남자의 혼잣말

                                          최양순

날마다 스쳐 지나는 사람들

각자의 시간 속으로 스미기 위해 빠른 걸음을 옮긴다

아무런 느낌도 없이 소멸되는 인연이다

 

마주오던 남자

머뭇거리며 말문을 여는 인연을 만든다

지갑을 잃어버렸다는 남자

집이 마석이라는 남자

차비 이천 원을 요구한다

 

그의 운세에 오늘 횡재수가 있다면 맞게해주자

가슴 찌르르한 한 병의 소주가 되든

집으로 가는 차비가 되든

쓰임새는 상관 말자

 

두장의 지폐를 건네받은

그의 작은 속삭임

" 다행이다"

늦여름 매미의 울음처럼 귀를 잡는다

 

앞니없는 입술을 들썩이며

하회탈처럼 웃는다

휑한 세상살이가

터널처럼 뚫린 잇몸사이로 새어나온다

 

그가 흘린 독백이 아리고 뜨거운 화석이 된다

 

다행이라는 그 말

 

5. 무용지물 가보론

                                          최양순

미동도 하지 않는 괘종시계가

거실 벽을 차지하고 보물 노릇을 하고 있다

구순을 바라보는 아버지 네살적에

쌀 두가마니 값으로 집에 들어온 귀한 물건이란다

태엽을 감아주면 지금도 충실하게

재깍 재깍 폼나게 움직이지만

시간마다 치는 종소리에 소스라쳐

침묵을 종용하고 말았다

 

바늘은 언제나 한 곳에 머물러 있지만

아버지는 그자리에 걸려 있는것만으로도

흐뭇해 하시니

가보임에 분명하다

 

무용지물 가보는 시도 때도 없이

6시를 가리킨다

조금 이른 아침인 듯

조금 이른 저녁인 듯

아버지를 향한 아들의 마음이

그 자리를 가리키고 서 있다

 

6. 또, 이렇게

                                          최양순

어머니 유택에 보라색 도라지 조화 한 다발 꽂아드리고

 

효도라도 한 듯 흐뭇하게 바라보다가

차가운 소주 한 잔 올리며

어머니 마음이 흡족해지기를 바라는 욕심도 부려보았습니다

 

여름에 덮으신 뗏장 이불이

동그맣게 단단해진 모양새가

나는 걱정마라 토닥이는 것 같아

가슴이 훈훈해졌습니다

 

성기던 눈발이 제법 나풀대기 시작하자

붐벼 댈 고속도로 걱정이 앞서

 

변덕부리는 겨울 날씨에 애먼 탓을 돌리고

부리나케 발길을 돌렸습니다

 

생각해보니

변덕스러운것은 겨울날씨가 아니라

제 마음이었습니다

녹아 없어질 눈발에 밀리는 마음이 부끄러워

목구멍을 밀고 올라오는 죄송하다는 말보다 먼저

 

눈물이 비집고 흐릅니다

또, 다시

조금만 더 머물다 올걸 후회를 합니다

또, 이렇게

 

7. 시를 읽다

                                          최양순

작은 텃밭에서

이정록시인의 시를 보았다

뻗어 나가는 수박넝쿨 사이

의자를 깔고 앉은 푸른 넉살

시인의 어머니가 아니어도

수박 엉덩이에 의자 하나쯤은 밀어넣어주는

농사꾼 인심

 

문장 한 줄 세우지 않고

시 한 편 건졌다

밤낮으로 퇴고하는 저, 둥근 문장

절창이다

 

8. 별미

                                          최양순

쌀독 항아리를 발끝으로 지그시 눌러도 아무런 기척이 없다

주루룩하는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쌀독을 열어보니 깜깜한 빈독이다

누르면 쏟아지는 쌀을 받아 먹기만하고

채워주지 않은 결과다

쌀이 떨어진 주말 아침

 

아득한 기억 속의 아침도 그랬다

쌀독을 긁는 바가지 소리가 부엌 가득 퍼지고

잔 칼질 소리가 한참을

바가지 소리를 뒤이어 울었었다

아침상엔 무가 수북한 밥그릇이 올라 앉았고

어머니의 한숨이 깊었었다

그 아침

어머니가 숟가락을 든 기억이 없다

 

그날처럼

도마 위에 무를 올려 놓고 굵은 채를 썬다

칼날을 받는 무가 참, 연하다

찬밥을 무밥으로 변신시킨 아침

아무도 슬프지 않은 무밥을 먹는다

별미다

 

9. 찾습니다

                                          최양순

"사람을 찾습니다"

"우리 강아지를 찾아주세요"

치매 노모를 찾는 전단과

잃어버린 강아지를 찾는 전단이

전봇대를 따라

어깨를 나란히 하고 붙어있다

야윈 노파의 사진 한 장이 가볍게 흔들리고

앙증맞고 야무진 표정의 강아지 사진이

세 컷이나 실려 육중하게 붙어있다

어느 사연이 먼저

저 곳에 내 걸린 걸까

 

산사 처마 밑,

속 비우고 이름만 부풀린 목어처럼

죄다 덜어내고 헐거워진 칠십팔 년의 세월마저 놓아버린

기억의 숨바꼭질

저렇게 종이 한 장의 여백으로

바람에 흔들리는 동안

강아지는 누군가의 온기에 젖어서 졸고있을지도 모르는 일

치매 노파의 서성거림은

어느 인연으로 멈추게 될지

 

전봇대 옆구리에 매달린

"사람을 찾습니다."가

축축하다

아침 햇살이

쨍함에도 불구하고

 

10. 흔적

                                          최양순

아름드리 은행나무는

아버지가 어머니께 남기신

마음 한 자락

 

​어느 날엔가

지붕 키를 흘쩍 넘는

나무를 어루만지며,

이 다음에

이 놈이 효자 노릇 할겨

당신 쌈짓돈은 챙겨 줄 거요

 

내 먼저 갈테니

당신은 좋은 세상 더 많이 보고 오소

하고 가신 지 십수 년

 

가을날 뒤란에 노란잎이

지천으로 깔리면

등 굽은 어머니는

홀로 은행을 줍는다

영감님이 주고 가신

쌈짓돈을 챙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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