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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시 '조영환 시인'사월의 아내 외 9편
복지TV청주방송 | 승인 2019.05.03 09:28

 

▲ 조영환 시인

[시인] 조영환

[약력]

* 충북 괴산 출생

* 동국대학교 국문과 졸업

* 계간 『다시올문학』 시 부문 등단

* 저서 : 동인지 『눈물의 연대시』 외 다수,

  편저 『윤동주 시인과 함께』

 

 

1. 사월의 아내

                                     조영환

아내가 옷장 서랍에 봄옷을 정리하다가

문득 눈에 익은 꽃무늬 원피스를 꺼낸다

스무 해 전, 그녀와 처음 만났던

사월의 어느 날 벚나무 아래에서

머뭇거리며 사랑을 고백하고

부끄럽게 서로를 안았을 때

그녀가 입었던 꽃무늬 원피스

해마다 사월이면 벚나무가 어김없이

내 기억 속에서 홀연히 꺼내 입는 화사한 그 옷

그러나 어느새 폐경에 접어든

아내는 물끄러미 거울 앞에서

젊은 날이 가뭇없이 빠져나간 꽃무늬 원피스를

쓸쓸히 이리저리 몸에 대어보는 것이다

무심한 척 곁눈질하는 내 눈에는

그녀의 적막한 등이 불현듯

꽃나무처럼 환해지는 것이나

까맣게 잊었던 기억 속 향기를 맡을 때처럼  

가슴은 저릿저릿 아릴 것이다

그러나 아내여, 사월은 가고 벚꽃은 진다고

눈물 글썽이지는 말아다오

낡아 해지는 것은 다만 꽃무늬 원피스뿐,

사랑을 고백한 날부터

내 생은 이미 수만의 꽃잎이

낱낱이 향기를 켜든 벚나무였으니 !

 

2. 등꽃

                                     조영환

기역자로 굽은 맹인 할머니를

허리가 펴진 맹인 할머니가 부축하고

조심스레 4층 예배당 계단을 올라간다

먼지 낀 유리창 너머 벽제공동묘지가 보일 뿐

나비 한 마리 날지 않는 봄날의 희망맹아원

예배당 안 무의탁 맹인들이 스물일곱

마애석불처럼 더러는 서고 더러는 장의자에

또는 휠체어에 앉아 맹인 목사가 들려주는

먼 먼 하늘나라 예수 이야기에 바위꽃 같은

귀들을 열고 있다 이따금 뒤쪽에서 파리한

맹인 청년이 몸을 떨다가 짐승 우는 소리를 낸다

“아, 빠, 언, 제, 올, 꺼, 예, 요?”

맹인 청년의 몸을 밀랍 같은 맹인 할아버지가

무릎에 부둥켜안고 있다 네 개의 팔과

두 개의 목이 등나무 줄기처럼 얽혀 있다

맹인 청년이 가위눌린 소리를 지를 때마다 말없이

손바닥으로 볼을 쓸어주던 맹인 할아버지의

창백한 입술이 등꽃처럼

청년의 머리와 목덜미를 입 맞추고 있다

 

3. 늙은 호박을 보며

                                     조영환

허허벌판 자갈밭 둔덕 마른 풀숲에

늙은 호박 하나 앉아 있다

두엄더미나 뒷간 지붕을 넘어

죽은 고욤나무와 가시철조망도 아랑곳없이

실낱같은 손아귀로 움켜잡고 휘감아 오르던

그러나 이제는 마른 덩굴마저 작파해버린

늙은 자궁이 서리를 뒤집어쓴 채

고요히 가부좌를 틀고 있다

삼매에 드신 관음처럼

침범 못할 견고한 몽상에 빠져 있다

벌과 나비를 어깨와 머리 위에 띄우고

하늘이 온통 노랗게 꽃피었을 청상靑孀

그렁한 눈 속에 치어 같은 새끼들을 기르며

방바닥에 등 한 번 제대로 눕힐 수 없었던

소슬한 절간인 몸 한 채, 장좌불와長坐不臥의 생

봄이 와서 꽃이 피는 것이 아니라

꽃이 피어서 봄인 자갈밭 위에

연꽃처럼, 팔순의 여자, 비로소 피어 있다

 

4. 봄날

                                     조영환

봄볕 투명한 툇마루에 나앉아

내 어머니 살구나무를 보시네

꽃 피었던 기억을 꽃보다 환하게 피우고

개미와 하루살이, 바람과 빗소리의 집이 된

살구나무 고목을 물끄러미 보시네

봄볕에, 마당귀에 돋은 명아주의 푸른 실핏줄이나

어머니 한 생의 기다림으로 굽어진 등과

슬픔의 뼈까지도 투명하게 비치네

살구꽃 흐드러지던 날 이별이 있어

봄빛은 어머니 눈에 가득하고

그 안에 아득히 살구꽃 피네

옷 보퉁이 가슴에 안은 열네 살 민며느리

내 딸보다도 어린 어머니의 눈과

살구나무 아래에서 딸을 보내는

그 아버지의 눈에도 봄빛은 가득했으리

바람도 없이 살구 꽃잎 흐득흐득 떨어져 내렸으리

시집온 지 일흔 해 북녘의 고향길 다시는 못 밟아

어머니 눈 속에는 사시사철 살구꽃 피네

흐드러진 살구꽃 아래 기나 긴 이별이 있어

내 어머니 생은 환한 봄날이네

 

5. 이장移葬

                                     조영환

구름이 좋아 하늘로 소풍 가서는

돌아오지 않는 아버지

구름 좋은 날

아버지 무덤을 이장移葬을 하네

슬픔도 윽박지르면 구름이 되나

사십 대에 청상(靑裳) 된 어머니

치마 뒤집어쓰고

들어가고 싶었다는 저수지

둑방에서 자식들

뭉게구름 같은 밥을 먹네

꾸역꾸역 구름경전을 읽네

흐린 저수지 수면에 미루나무 한 그루

둥지로 날아가는 까치 두어 마리

새끼들 깃털 한 올 젖지 않고 날았던 하늘이

어머니 환한 슬픔 속이었나

 

6. 정화수井華水

                                     조영환

꽃 피는 물이 정화수뿐이랴

첫새벽 이슬이 내린 공원에서

치매가 오신 장모님 물 길어 오신다

쭈그렁 배낭에 꿀렁거리는

페트병 가득 담아 지고

그믐처럼 제주도 성산포 돌담길 걸어오신다

잉걸불 같은 남편과 두 아들을 바다에 여의고

죄도 없이 부끄러워

바다 속으로 자맥질하던 파랑波浪의 세월

그미는 유채꽃 같은

딸내미 하나 데리고 물속에서 늙었다

세월은 파고波高 높은 주름을

그미의 온 몸에 새겼지만

한 동이의 생을 지고

한 방울의 물도 흘리지 않은 채

구도자처럼 걸어

그미는 드디어 번뇌가 적멸한 이어도에 들었거니

꽃 피는 물이 정화수뿐이랴

알몸에 물미역 같은 바람을 입고

자궁에서는 첫 해조음이 피는

그미가 새벽마다 심연에서 길어 올린

정화수로 나는 마른 목을 축인다

 

7. 매화꽃

                                     조영환

어두운 노래방에서

칠순의 어머니가 노래를 하신다

전신마취는커녕 국소마취도 않고

생의 중동이 절단된 늙은 매화나무

유방암 수술을 받은 어머니

손자들이 흔드는 탬버린 소리에 맞추어

춤을 추신다

팔뚝에 링거병 주렁주렁 열린 매화나무

쓸데없이 덜렁대는 유방 한쪽 잘라내 시원하다 웃던

청상靑裳의 어머니

눈보라 치는 한데의 생

아랫목 같은 품속 눈물 뜨건 밥

파출부로 삼남매를 여의었으나

다만 장가 못간 둘째 아들 불쌍하다

병실에서 환하게 눈물바람 하던 어머니

오늘은 그 아들의 다섯 살짜리 아들이 흔드는

야광 탬버린 소리에

겨드랑이에 귓불에 눈썹과 손톱에

휑한 가슴팍에 매화꽃 핀다

초경을 두어 해 앞 둔

손녀의 볼우물이나 비린 거웃 같은 것

홍방울새의 소리와 소리들

빛 부신 찰랑거림에

어머니도 손자들도 향기처럼 몸이 번져

눈물 반짝이는 한 그루 매화가 핀다

 

8. 운주사雲住寺에서

                                     조영환

천불천탑 운주사는

허랑한 구름 속에 있지 않았다.

요사채 툇마루에서

말갛게 별을 올려다보거나

추녀 끝 풍경소리에 새 귀를 여는

노스님도 없었다.

쥔장 없는 절집

온 사방이 무럭무럭

뜨건 김이 오르는 시꺼먼 보리개떡이었다.

별과 별 사이를 겅중겅중 건너뛰는

검은 소가 푸짐하게

똥 싸놓으신 떡집이었다.

허위허위 보릿고개 넘는 사람들에게

제 몸 선뜻 떼어 먹이는 보리개떡 둥덩산이었다.

저 지지리 못난 부처들을 보라.

그대에게 코 떼어준 부처, 얼굴 내어준 부처

하반신을 통째로 내어준 부처

다 내어주고 몸 희미해진 부처

절벽 아래 오종종하게 모여

한 번 더 뜨시게 몸을 데운다.

산마루에는 무지개떡이 된 부부와불도 있다.

나란히 너럭바위 안으로 들어가 누워서는

천 년을 까맣게 잊은 부처가 있다.

진다홍으로 물든 개복숭아꽃

그 머리맡에서 몸 외로 꼬고 열반에 든

 

9. 향적봉香積峰에서

                                     조영환

향적봉에 눈꽃을 보러갔는데

눈꽃은 눈꽃의 향기는커녕

유백의 순록들만 있더군요.

순록의 뿔들만

순록의 행렬만 있더군요.

아니, 백치들만 있었습니다.

머리를 땅 속에 깊이깊이 처박은 순록들

캄캄하게 내년이나 내후년의

나도바람꽃이나 홀애비바람꽃

혹은, 잠잠히 세월 잊은

얼레지꽃을 뜯고 있더군요.

미동도 않는 것이었어요.

…… 간지러웠습니다.

더운 콧김이 나를 자꾸 더듬었거든요.

티끌 수미산만한 내 몸뚱어리를

그대가 자꾸 더듬는 것 같았거든요.

 

10. 강매역江梅驛

                                     조영환

봄이면 매화나무가 강물에

눈꽃개비를 날리던 강매江梅

봄날 논길 걷던 여섯 살 아들이

황새가 발 담그고 서 있는

논물을 눈 찡그려 보며

아빠, 칠성사이다 같아요 부르짖던 곳

여름날 켄터키치킨을 사들고

경의선 기찻길 둑방에 나가면

개구리 우는 아카시아 숲

어둠 속에서 뜬금없이 반딧불이가 날아올라

길길이 나를 뛰게 하던 곳

아이가 이를 연필로 꾹꾹 눌러 쓰고

선생님이 깜짝 부러워하던

강매에는 이제 반짝이는 아무것도 없다

눈 오는 밤 멍하니 수은등 아래에서

수색 지나온 막차를 기다릴 때

늙은 역무원이 눈을 맞으며

매화 꽃잎 같은 눈을

가만히 빗자루로 쓸고 또 쓸어

그 소리에 간신히 머리를 식히던

기다림만 남았다

강매에는 이제 눈 감고

캄캄히 어둠 속을 구르는 기차 바퀴만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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