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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시 '강경아 시인'여수 밤바다 외 9편
복지TV청주방송 | 승인 2019.04.30 10:02
▲ 강경아 시인

[시인] 강경아

[약력]

* 1974년 여수 출생

* 2013년 『시에』로 등단

* 시집 『푸른 독방』

 

 

 

 

 

 

 

 

 

1. 여수 밤바다

                                    강경아

너를 부르기로 한 자리에

바다가 먼저 와 있었다

파도를 한 장씩 꺼내어볼 때마다

메밀꽃이 하얗게 피어나곤 했다

 

나직히 너를 부르면

따라오는 발자국이

그림자처럼 커졌다 작아졌다

 

밤바다를 홀로 걷는 것은

외로움을 닦기 위해서가 아니다

나를,

너를 불러내려는 것이다

 

우리는 한 번쯤은 슬픔으로

외로움으로

서로를 불러주어야 한다

너라는 이름으로 나를 불러주어야 한다

 

2. 목련꽃 그 남자

                                    강경아

 

언제나 그렇듯 승자는 없었다

쓰리고에 피박, 광박에 흔들었다 해도

목련처럼 환해지는 그의 얼굴을 보았을까

꽃잎 말아 올리듯 순하디순한

그의 속눈썹을 보았을까

결이 고운 목련으로 거듭나기 시작한 건

화투패를 움켜쥐며 혼잣말을 흘릴 때부터였다

 

바다가 보이는 어느 외딴 포구

꽃망울 터지는 소리가 수화기 너머로

울음처럼 밀려왔다

여기가 어딘지 모르겠다고,

솜털이 숭숭한 꽃눈으로 갓 부화한 알츠하이머

지상 밖으로 저를 놓아버리고

빈 가지 끝에서 한없이 흔들렸다

밤새 배냇짓에 웃다가도

꿈속 어디를 헤매는지 앓는 소리가

각기 다른 성조로 가늘게 이어졌다

 

꽃이 다 진 후에야 알았다

바람의 입김에도 쉬이 흔들렸던 까닭을

우리를 기억해내기 위한 몸짓이었다는 것을

이제, 어린 푸른 잎들도

끊임없이 흔들리며 무성해질 것이다

목련나무 그늘의 평수를 늘리시며

시간의 태엽을 감고 계시는 아버지

환하게 웃고 계신다

 

3. 해물순두부

                                    강경아

레시피 방문을 열 적에 내 맘대로 조리해야 하는 불문율에 대해 어떠한 대꾸도 해서는 안 된다 쿵따, 대중없이 물 한 대접 반에 야근에 비쩍 마른 다시마 몇 조각 둥∼ 둥∼ 띄워놓고, 잔머리 굵은 멸치 여러 마리, 댕글댕글한 양파, 대파, 마늘 매섭게 풍덩풍덩, 세상사 허벅지게 펄∼ 펄∼ 우려내는디 쿵기덕 쿵,

 

만년 김 대리 퇴근길 굽어진 허리춤이 익힌 새우살처럼 창백하네, 우수 고객 접대하랴 밤낮으로 정성을 다해 모시겠다 외쳐대랴, 울긋불긋 울화통이 바지락 콧방귀 소리마냥 펑펑 터지는데 알싸하게 몰아치는 부장님의 잔소리, 엇박자 장단으로 하늘에서 쏟아지니 오징어 다리 오그라들 듯 간, 쓸개, 존심마저 갖은 야채로 달달달 볶아지네, 순두부 하나 조심스레 얹어놓고 으스러질세라 살살 달래놓고 눈물 한 줌 짭조름허니 간 맞추어 내놓으니

 

한 술 뜨다 말고 울컥울컥 두 눈이 벌게지는 해물순두부

 

4. 와불 한 쌍

                                    강경아

거기 뉘신가

납작 엎드려 공손히 경배를 드리는 이

신도시 어느 광야에서 벌벌 떨다

목이 축 늘어진 채 벙어리 꽃잎처럼 다소곳한가

 

느긋한 방바닥에 잠시 펴지는 발바닥의 옹이들이 반질반질하다 녹슨 현관 일주문을 지나 켜켜이 바위 틈새 안방으로 동안거에 드시려는지 시큼털털한 진땀 냄새 고요히 풍겨오는데 보도블록에 꾹꾹 박힌 하루 몫의 압력들이 고슬고슬 화색이 돈다

 

키를 낮추어야 볼 수 있는 골 패인 주름의 안부들 수십 번 뒤집혔을 속사정도 바닥에 납작 누웠다 지금쯤 지상의 어느 반환점을 돌고 계시는지 굽은 채로 넉살 좋게 잠꼬대도 하신다

 

막다른 동굴에서 걸어 나오시는 이

뉘신가

 

텅 빈 거실 한복판

양말 한 켤레의 허물

당신의 러너스 하이, 러너스 하이

42.195킬로미터, 거룩한 꿈의 시간이다

 

5. 긴요한 골목

                                    강경아

 

벽과 벽, 좁은 길 틈 사이에서 나는, 자주 길을 잃는다

가래가 들끓는 쇠기침 소리는 안개 낀 골목의 후렴구다 전신주 외줄을 타며 율(律)을 맞추는 이 변주곡은 폭설 뒤 고요처럼 아랫목에서 절정을 이룬다 진성과 가성을 오가며 의식이 혼미해질 때쯤 골목의 계절은 열린다

 

키 낮은 작은 지붕들이 한숨을 짙게 내려놓는 밤

크레인 난간에서 고공낙하의 비행을 꿈꾸는 당신의 울분은 푸른 목청 앞에서 빈번히 무너졌다 수없이 꿇었던 무릎들과 마주하는 설움은 구겨진 고지서 뭉치로 귀를 틀어막았다

 

골목의 수피들이 다투어 피어나는 결핍의 화음(和音)들

벗겨진 페인트 껍질이 쇠문에 바짝 붙어 찬바람에 너덜거렸다

결이 고운 눈물의 길을 따라 연대하며 걸어 오르면

깨진 가로등 불빛도 희망이 될 수 있을까

 

습한 이끼들의 무표정은 전염성이 강해

타이록신캡슐* 한 알

욱신거리는 골목의 뼈마디에 털어 넣는다

 

*항생제의 한 종류

 

6. 어떤 출판기념회

                                    강경아

복지관 복도에서 불어오는 찬바람은

휑했던 마음의 깃을 세우기엔 충분했다

 

―언제 요런 걸 다 썼다냐

―난 그 시간에 방바닥에 어퍼져 잤는디

―니가 겁나게 자랑스럽다잉

 

곁과 곁 사이 비좁은 틈새로

따스하게 새어 나오는 말

 

꽉 움켜쥔 마이크가

자꾸만 뒤틀리는 몸 때문에

제멋대로 움직여도

발음이 새어 어눌해도

문장 문장마다 가슴에 와 박힌다

 

―왜 그렇게 걸어요?

언제부터 그랬어요?

걸림돌 하나 없는 길을

조금만 걸어도 넘어지고 넘어지고*

 

거칠게 흔들리는 그의 낭독은

낮은 곳에서, 고요하게

물살을 일으켰다

한 물결이 또 다른 물결에게

마음을 내어준다는 것

그 물결이 더 큰 물결이 되어

서로의 마음 안자락에 파랑(波浪)을 일으키는 것

그것이 시(詩)이리라

 

한겨울

꽃다발 속에서 환해지는 그의 미소가

봄날 제세동기를 켠 듯,

 

*여수시장애인종합복지관 문예창작반 작품집 「어떤 시선들」 중에서

 

7. 빗소리

                                    강경아

아버지도 그러했다

불안과의 동침 속에서 나의 거친 등고선 같은 지문을 펴주기 위해 찬 바닥에 무릎을 꿇고 더 이상 낮아질 수 없는 곳까지 엎드려 동전 몇 닢에 죄의식을 치르곤 했다

 

딱히 갈 곳도 없는 나는,

유통기한을 훌쩍 넘긴 먹다 남은 빵조각과 누군가 씹다 버린 담배꽁초들이 주머니 속에서 열세 번이나 몸을 뒤척이는 동안에도 노숙의 유전자를 타고난 내력에 대해선 묻지 않았다

 

가판대 플레이보이 잡지 속 그녀가 웃는다

언제나 그녀는 절대 호의적이어서 살며시 그녀의 팬티 속으로 손을 넣어본다 계절을 읽지 못한 몇 벌의 옷과 어지럽게 뒤섞여 보지만, 아직 밤은 차다

 

바람이 젖고, 발걸음 소리도 젖는다

골목 귀퉁이에서 번져오는 지린내와 쉰내, 버물어진 공사판 국밥이 그리워지는 오늘,

지상에서 가장 낮은 지붕을 따끈하게 내리치는 빗소리

 

출근 도장을 찍는 소리

 

8. 비렁길에서

                                    강경아

 

청태 자욱진 능선을 따라

그대에게 닿는 순간부터 출구는 없었다

서 있는 곳조차 알 수 없는 안개는

앞서거니 뒤서거니 발목을 붙잡기도 했다

더는 내디딜 곳 없는 벼랑 끝

바람마저 발톱을 세워 휘갈기는데

문득 아비가 생각나는 것이다

소금기 끈적이는 아비의 비린내가 눅눅하다

세월을 무질러 와 얼마나 더 깎이고

문드러져야 삶이 뜨거워지는 것이냐

어쩌자고 빈 통발만 수면 위로 뜨는 것이냐

물빛 하나 건지시려

길고도 먼 두레박을 그렇게 드리우셨는가

밀고 당기며 끌려오는 생(生)

축축해지도록 진종일 바다만 바라보다

닻을 올린다

낮은 지류에서 뻗어나간 아비의 물길이

저 광활한 대양으로 나아가시는가

푸르게 쏟아지는 햇살 한 뼘 위로

물결 한 올 일으켜 세운다

파문처럼 사위가 철썩거리는

내 유년의 안감을 들추어본다

선홍빛 아가미살이 펼쳐지는 함구미 선착장

에움길 돌고 도는 비렁길

벌겋게 달구어지는 아비가 보인다

 

9. 푸른 독방

                                    강경아

 

문패는 플러그가 뽑힌 채 돌아누웠다

거실 모퉁이를 한 겹씩 벗겨내면

울컥 새어 나오는 어둠들

착각과 혼돈이 팽팽하게 충돌하는 곳에

짓밟힐수록 더 빳빳해지는

당신의 붉은 혀와 오래된 두 귀가 있다

조울을 앞세워 불안을 지피는 밤이 오면

애매모호한 상형문자들만 먼지처럼 쌓인다

 

소파 위를 군림하길 좋아하는 당신

무기력을 조종하는 채널을 돌린다

우울을 닦아내듯 징징거리는 볼륨 소리

잘 개키지 못한 감정들이 더욱 또렷해져 온다

무늬 없는 저 표정이 나를 밀어낸 증표라면

까다로운 궁리들만이 체위를 바꾸며 다가온다

 

또르르 발길에 차이는 투명한 알람 소리

밤새 다독이지 못해 눅눅해진 이름들

껍질이라도 잘 벗겨 베란다에 내걸어야 할 일

 

다시,

꺾인 무릎을 세우게 하는 내겐 너무나

딱딱하고도 거룩한 독방

 

10. 서시장, 그 틈새 소리를 굽다

                                    강경아

타닥타닥 혼잣말들이 괄호 속에서 튄다

어둠은 한숨보다 아리게 먼저 다가오는 법

질긴 가난의 혈색에 대해 묻지 않아도

생의 끝자락은 늘 창백한 것이어서

희뿌연 근심의 무게를 재어보다가

까닭 없이 목울대를 치며 붉게 충혈되는 것이

쓴 소주잔을 꺾는다

 

진급이니, 연말정산이니, 적당하게 썰어 놓은 나완 상관없는 뻔한 이슈들이,

불편한 신념들이, 자존의 가치들이, 불판을 바꾸듯 회전되고 있을 때

 

젓가락이 무겁다

 

봉분처럼 부푼 금붕어의 부릅뜬 동공이

식당 그릇에 묻혀버린 아내의 뒷모습이

고시원 단칸방 어린 남매의 시린 발들이

까맣게 타들어 가는 돼지껍데기처럼

밤새 질겅질겅 씹혔다

 

타닥타닥 튀는 저 살아 있는 꿈틀거림 속에서

타전되는 무중력의 푸른 외침

뒤집자

뒤집자

뒤집어보자,

짧고 여리게 터지는 아직 내겐 쓸 만한 희망들

눈 속에서 더 단단해진 그 경쾌한 방백(傍白)들

생의 반대편 안자락까지 노릇하게 달궈지는 눈빛들이 환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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