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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시 '유승도 시인'
이재연 기자 | 승인 2019.04.26 11:32
▲ 유승도 시인

[시인] 유승도

[약력]

* 1960년 충남 서천 출생

* 1995년 『문예중앙』으로 등단

* 시집 『작은 침묵들을 위하여』, 『차가운 웃음』,

  『일방적 사랑』, 『천만년이 내린다』,『수컷의 속성』

* 산문집 『촌사람으로 사는 즐거움』, 『고향은 있다』,

『수염 기르기』, 『산에 사는 사람은 산이 되고』 등.

 

 

1. 사투를 벌여야 한다면

                                        유승도

여기는 내 집 옆이다 나도 물러설 수는 없다 그래, 나를 어찌하고 싶다면 덤벼라 누구 하나가 죽어야 한다면 한번 해보자

낫을 든 오른손에 힘을 주었다 살짝 피하면서 찍어야 한다

멧돼지는 팍팍 땅을 찍으면서 달려왔다

마악 발을 움직이려는 찰나였다 좀 더 세게 땅을 앞발로 팍 찍는가 싶더니 멧돼지가 방향을 틀어 나무 사이로 달려갔다

목숨을 걸고 싶은 마음은 없었구나 비켜줘서 고맙다

멧돼지의 발걸음이 일으키는 소리도 곧 들리지 않았다 숲이 깊다

 

2. 닭장 밖을 홀로 거니는 닭

                                        유승도

닭장을 벗어나 홀로 거니는 놈이 있다

놈이 죽으면 다른 놈이 나타난다

거 참 희한도 하지

자기만 아는 구멍을 통해 벗어나, 닭장 안에서 흙 목욕을 하거나 교미에 열중하는 닭들은 쳐다보지도 않고, 유유히 밭가를 거닐거나 박박박박 밭을 파헤쳐 벌레를 잡아먹는다

그놈 참, 이쁘지는 않지만 밉지도 않으니

그렇게 살고 싶다면 그렇게 살아라 하지만 고양이나 매가 덮쳐도 나는 모른다 행여 목숨을 걸지 않았다면 내일부턴 벗어나지 마라

그래도 그렇게 살겠다면 나도 모른 체할 테니 그렇게 살아라

 

3. 수컷의 속성

                                        유승도

내 눈에는 새끼가 어미에게 달려드는 것으로 보이는데 흑염소는 어미가 아니라 암컷으로만 보이는 모양이다

소년의 풋풋한 기세로 자라난 새끼 옆에서 어미 흑염소는 엎드린 채 괴성을 내질렀다 이윽고 양수가 터지자 수컷 새끼 두 마리가 어미에게 달려들었다 아비 수컷도 함께 뒤엉켜 흙먼지가 자욱하게 일었다

암내만 풍기면 달려드는 수컷들 앞에서 나는 끼어들지도 못하고 마냥 서 있었다 세상이 흘러가는 힘은 이렇게도 막을 수 있는 게 없다

 

4. 가을 산책

                                        유승도

자동차 바퀴에 납작 눌려서 집 앞 길바닥에 붙은 뱀이 발을 막는다

먹으려고 죽인 게 아니라 무서워서 죽이거나 어린 아들이 행여나 어찌 될세라 두려워서 죽인 독사다 내 눈에 띄었으면 또 죽였을 것이니 지나다 깔아버린 운전자가 밉지 않다

죽은 놈인데도 검고 붉은 얼룩무늬가 빛을 발한다 ‘슉’ 발목을 물고 늘어질 태세다 다가가지 않고 보았다 슬픔을 자아낼 만큼 어여쁜 몸이다

 

불현듯 고개 들어 둘러보니 독사의 형색으로 물들은 산중이다

독사를 잡아먹은 가을이 꿈틀거리며 흐른다

 

5. 백지

                                        유승도

아무것도 쓰이지 않은 종이를 보면 젖 대신 멀건 밥물을 먹다가 죽었다는 여동생이 생각난다

이름도 없고 무덤도 없다 출생신고를 하지 않았으니 사망의 흔적이 어느 종이엔가 남아 있지도 않다

바닷가 모래 언덕에 묻고 사기그릇 하나를 엎어 놓았는데, 어쩌다 생각나 가봤더니 바람에 날린 모래가 덮어 어디였는지 알 수가 없더라

큰형의 얘기 속에서나마 간신히 살아 있는 동생, 그랬다 막내인 줄 알았던 내게도 동생이 있었다 어여뻤을지도 혹은 보기 싫었을지도 모를

 

6. 아들의 동화

                                        유승도

빵집을 열어 종일 빵 냄샐 맡으며 살았으면 좋겠어요

입에 빵을 넣으며 빵빵하게 웃음 짓는 사람들을 보면서 하루를 보내면 얼마나 좋겠어요?

가게 앞을 지나가는 사람들이 빵 냄새를 맡고는 기분이 좋아져 굳은 얼굴이 펴지는 걸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흐뭇하잖아요

인생이 고소하고 부드럽고 달콤할 거예요

 

7. 좋은 징조

                                        유승도

무심코 하늘을 올려다보았더니

보름달이 슬며시 웃고 있다

달이 나를 보고 웃다니

가만, 뭐 좋은 일이 있으려나

방에서 들려오는 아내의 목소리가 곱다

 

8. 부처님 오신 날

                                        유승도

아내는 등을 하나 사서 이쁜 짓이라곤 뭐 하나 한 일이 없는 내 이름을 아들 이름 앞에 넣어 달았다 그 등 아래서 아내와 아들과 함께 산채비빔밥을 먹고 자리를 옮겨 그늘막 밑에 앉아 차도 한잔 마시고

어허, 평화로운 날이구나

아들과 한 말씀 주고받은 뒤

절을 나서며 입구 탁자에 놓인 떡 봉투 하나를 집어 들었다

한 집에 하나씩만 가져가세요

아내가 집어든 걸 뻔히 보고도 나는 기어이 하나를 더 들고나왔지만 아들은 집을까 말까 엉거주춤 내밀던 손을 거두어 앞뒤로 힘차게 흔들며 나왔다

아들 옆으로 다가가 손을 툭 치며 말했다

나도 네 나이 정도 먹었을 땐 차마 들고나오지 못했다 저기 저 노인 좀 봐라 두 개를 들고나왔잖냐

 

9. 소쩍새가 울어서

                                        유승도

오늘 하고자 했던 밭 갈기를 마치고 마당에 서서 어둠이 내리는 앞산을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곧 밤이 되자 소쩍새가 어둠을 달구며 웁니다 서산 위로 초승달이 뜨고 별들도 하나둘 나타나 빛을 쏘아댑니다 등 뒤 골짜기에선 물소리가 저승사자의 웃음소리인 듯 다가옵니다 숲에선 짐승의 발걸음 소리가 새어 나옵니다

달이 향나무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옮겨지는 동안 움직이지 않고 서 있었습니다 밤이 익을수록 깊이 파고드는 소쩍새 소리만 아니었다면 일찍 방으로 들어가 몸을 뉘였을 테지요 달과 별과 물소리와 숲속 짐승과 나를 이어주는 소리만 아니었다면

 

10. 남 다 심은 뒤 감자 심기

                                        유승도

아직도 안 심었냐고, 묻는 건지 타박하는 건지 모를 말을 이웃 아주머니에게 들은 뒤로도 며칠이 흘러서야 밭으로 나갔다 어느새 풀이 푸르고 나비가 난다

밭가에 앉아 지나가는 바람의 꼬리를 잡기도 하다가, 다가온 윗집 용해를 집으로 데리고 가 맥주를 나누었다

감자야 오늘 심지 못하면 내일 심으면 되고 내일도 심지 못하면 모레 심어도 상관없는 일이다 하긴 글피 심으면 또 어떠랴

햇살이 맑고 따뜻하니 봄날은 빠르구나 엊그제 내린 비로 도랑물은 세차게 흐르는구나 참 바쁘기도 하구나

wodldus@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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