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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시 '황구하 시인'
복지TV청주방송 | 승인 2019.04.12 09:54
▲ 황구하 시인

[시인] 황구하

[약력]

* 1965년 충남 금산 출생

* 2004년 『자유문학』으로 등단

* 시집 『물에 뜬 달』, 『화명』

* 산문집 『바다로 가는 나무』

 

 

 

 

1. 나무에서 물고기를 구하다

                                     황구하

나무 열매를 먹는 물고기가 있다네

물에 떨어진 열매 아삭아삭 삼키고 잘 여문 씨앗을 배설한다네

 

나무는 물고기의 혈통이라는 생각

그래서 연목구어라는 말도 가능태로 다시 명명해야 하지 않을까 궁리해보네

 

숲은 스스로 길을 내는 물소리 물고

아주 먼 길 거슬러 유영하는 어족의 나라

 

뜨겁고 습한 우기를 건너 하늘도 푸르게 한숨 자고 일어나면

바람 한 타래 알을 매달고 둥근 물결 이파리 사운거리네

 

랄랄랄라 나무 한 마리 두 마리 꽃을 피우네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낮은 곳에서 더 어두운 곳으로 흔들고 흔들린다네

 

세상 가장 슬픈 목숨은 나무로 서 있는 물고기 부족

눈물이 범람할 때마다 깊은 잠을 헤엄쳐 어린 물고기 돌아온다네

 

당신이 허공으로 두 팔을 뻗는 동안

물고기 몸에 나뭇잎 문양을 새겨 넣으며 또 하나의 영토를 건설하는 나무가 있다네

 

2. 상강

                                     황구하

기러기는 오지 않았습니다

허리 휜 구절초 마당가에 두어 필 몸을 풀었습니다

술이나 치자

꽃잎 한 점 술잔에 둥둥 떠올랐습니다

빗물받이 녹슨 양철통에도 바람 소리 흘러내렸습니다

말라가는 기억으로 색색한 시절을 몽땅 비워내고도

집 앞 느티나무 위독합니다

산마루에 걸터앉아 골똘히 턱 괸 하얀 달빛

도랑물 소리 점점 커졌습니다

 

3. 화명

                                     황구하

함께 이루는 생은 얼마나 황홀한가

 

상주시 부원동 석운도예공방

토끼랑 닭이랑 네 집 내 집 없이 드나드는 앞마당 한쪽

늙은 호박 한 덩이

 

생을 이어주던 넝쿨넝쿨 다 어디가고

무거운 육신 밤새 내린 하얀 눈 속에 묻혀

노을빛 속살 덜어내는 중이다

 

검붉은 깃털 윤기 잘잘 흐르는 장닭 다가와

누비 눈으로 감싸인 어깨 부리로 쪼는 순간

덩덩, 북소리가 난다

 

해진 앙가슴에 달라붙은 토끼 두 마리

고개 갸웃거리며 갉아댈 때

샤샤샥 일렁이는 중심의 물결

 

생의 소리가 저 늙은 호박에 다 들어앉아 있나

감나무 아래 백구도 어느새 담장을 타고

허공을 향해 컹, 컹, 후렴을 한다

 

소리가 소리를 키우는 눈부신 고요

 

4. 바닥

                                     황구하

아래층 옥상, 나무 한 그루 서 있다

스티로폼 상자에 뿌리를 박았다

꽉 껴안은 푸른 이끼에도 하늘이 있듯

저 나무에게도 땅이 있을까

길 없는 길을 끌고

난감하다 저 유목,

온전히 터 잡을 수 있을까

바닥을 칠 수 있을까

집 한 채 짓는 지상의 생이

허공이라니, 벼랑이라니

더 이상 밀려날 곳 없는

거처,

한 숨통 아래 새소리 바람 소리 걸려 있다

아래층 옥상 나무 한 그루, 산다

 

5. 붉은 이파리

                                     황구하

유명 시인, 헌책방골목에 나타나셨다

 

000 시인께,

유명하지 않은 혹은 유명하기도 한 시인 이름 옆에는

올림 또는 모심, 더러는 낙성관지 붉게 찍힌 시집들 아찔하다

 

그중 눈에 익은 시인의 시집 한 권 들고

무심코 책갈피 넘기다 보니

벚나무 이파리 한 장, 숨죽인 채 누워 있다

 

심장 굳어 화석이 된 어느 부족의 시신처럼

별빛으로 달빛으로 시를 읽다가

문득 숨 내린 그 자리, 꽃잎 훌훌 벗어 던지고

텅 빈 허공, 잠시 머물렀을 시인의 눈빛을 생각해본다

 

시를 뿌리는 이랑에서 자꾸만 바스러지는 손자국과

시를 거둔 책장에서 구석으로 구석으로 내몰리는 눈동자와

시를 버리고 집을 나와 비로소 바람에 얹힌 발소리

 

붉게 묻어나는 시간을 따라 이제 어디든 갈 수 있겠다

 

벚나무 옹알이 첩첩 내 몸으로 옮겨오듯

그래서 세상 모퉁이 그늘에 달라붙은 주춧돌처럼 우뚝

시는 그렇게도 발견되거나 발굴되기도 하는 거라며

유명 시인, 헌책방에서 고즈넉이 강연을 하고 계시다

 

흉터로 남겨진 시, 배낭 속에서 울고 있다

 

6. 고드름

                                     황구하

벌써 며칠째, 이 죽도 저 밥도

통 뭘 먹지 못하겠다는 아버님

 

뜨끈뜨끈 드시고 싶다는 추어탕

겨우 두어 술 애써 넘기더니

아이구, 쓰다 왜 이리 쓰나

 

우두커니 한숨 쉬며 퀭한 숟가락 내려놓고

물 한 잔을 드신다

 

거 참, 달다 참 달다

 

오래된 밥상머리 기억 더듬으며

 

벌써 며칠째, 축 늘어진 중환자실 링거액만

한 모금, 또 한 모금

 

7. 흰 고무신

                                     황구하

오래된 비탈 묵정밭 일궈 어머니는 고사리를 심었다

 

구부러진 몸 비탈을 향하여 수굿하게 기어올라야

 

허리가 아프지 않다는 것

 

평지가 오히려 비탈일 때 많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비탈과 한 몸이 되어 오르내리는 염소처럼

 

두 손도 발이 되어 고사리순 꺾을 때면

 

허공의 구름도 허리를 쭈욱 펴고 뒷산을 넘어가고 있었다

 

어머니 낡은 신, 비탈밭에서도 미끄러지지 않고

 

세상을 반듯하게 펴고 서 있었다

 

8. 이모화

                                     황구하

 

홍도화 만나고 온 밤 몸이 아프다

 

구들장 뜨거운 방 두꺼운 이불을 덮고 지져도

천근만근, 온몸 열이 오르락내리락 춥기만 하다

 

어쩌자고 비 내리는 그 먼 길 달려가

목덜미 서늘한 꽃바람 바라보았는가

 

절 아래 돌무더기에 홍도화 한 다발 올려놓고

무병 앓던 이모는 혼잣말을 자주 했지

 

저승 갈 때 나는 허연 삼베 말고

저 꽃으로 옷 한 벌 지어 입고 가믄 좋겠네

 

바람이 우물우물 빨아먹은 꽃물

벼랑으로 번져 툭, 봄날은 흘러 흘러간 지 오래

 

어둠 펴고 작두 타는 징 소리 장구 소리

허공 어디쯤 풀려나와 꽃대를 흔들고 있나

 

또다시 봄날, 어질어질 만첩의 적막 울음 듣는다

 

9. 감기

                                     황구하

참꽃 피었다

 

병풍산 오르다 터진 바위틈 햇살에 몸을 맡긴 채 꽃이 된 화사(花蛇)를 본다 꽃다발을 이루는 무리, 손에 든 붉은 꽃잎 삽시간에 척척 널브러지고, 열꽃 앓는 여자는 시퍼렇게 운다

 

봄 언덕 빈집 한 채 아직도 덜컹덜컹 낡은 문짝이 있다 가파른 어지럼증이 있다 뿌리내리지 못하는 황사 바람 너머 어둡고 축축한 방, 한 줌의 고요가 마당을 휘저으며 혓바닥을 날름거리고, 용을 써 도망쳐도 제자리, 숨이 멎는다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다

 

달뜬 몸 둥글게 말고 누운

잠과 잠 사이

 

참꽃 덤불 아스라이 걸려 있다

 

10. 장미화점집

                                     황구하

뱃고동 소리 짚으며 점을 치고 있다

 

바닥 아래 수평선 잡아당긴 빨랫줄에

벌레 먹은 양말 한 켤레 붉은 집게에 물려놓고

돌고 돌고 돌아가는 회오리 물살

 

평생사주 궁합 방위 신수 택일 행선 매매 육효전문

 

해와 달이 갈마들어

바다에 스며드는 삼라만상

 

뻔한 답이 보여서, 그 흔한 길이 가로막혀서

사는 게 벼락인가, 벼랑 끝인가

 

뱃길 열리면 찻길 닫히고

찻길 열리면 뱃길이 닫혀

 

호이 호이 붉은 입술 부르트도록 가시 바람 부르며

오지 않은 꽃잎, 서성이던 갈매기까지

꾹꾹 점자를 읽던 맹인 할매 점바치

 

먼지 뒤집어쓰고 글썽이는 간판

흉터 숭숭한 판자문에 비뚜름히 기대어

 

새 영도다리 들어 올리는 세상을 점 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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