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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시 '김경성 시인'
복지TV청주방송 | 승인 2019.03.12 17:13
▲ 김경성 시인

[시인] 김경성

[약력]

* 전북 고창 출생

* 2011년 《미네르바》를 통해 등단

* 시집 『와온』,『내가 붉었던 것처럼 당신도 붉다』

 

 

 

 

한 폭의 우아한 그림처럼 짙은 시적 표현력으로 시를 통해 깊은 여운을 담아낸 김경성 시인의 시(詩)를 소개한다.

 

1. 와온

                                     김경성

목적지를 정하지 않았으니

멈추는 곳이 와온臥溫이다

일방통행으로 걷는 길 바람만이 스쳐갈 뿐

오래전 낡은 옷을 벗어놓고 길을 떠났던 사람들의 곁을 지나서

해국 앞에서도 멈추지 못하고

세상의 모든 바람이 비단 실에 묶여서 휘청거리는

바람의 집으로 들어선다

눈가에 맺힌 눈물 읽으려고

나를 오래 바라봤던 사람이여

그 눈빛만으로도 눈부셨던 시간

실타래 속으로 밀어 넣는다

흔들리는 것은 바람만이 아니다

흘러가버린 시간의 날줄에 걸쳐 있는

비릿한 추억, 삼키면 울컥 심장이 울리는 떨림

엮어서 갈비뼈에 걸어 놓는다

휘발성의 사소한 상처는

꼭꼭 밟아서 날아가지 못하게 하고

너무 깊은 상처는 흩어지게 펼쳐 놓는다

소용돌이치는 바람의 집

네 가슴 한껏 열고 들어가서

뜨거운 기억 한 두릅에

그대로 엮이고 싶은 날이다

 

2. 내가 붉었던 것처럼 당신도 붉다

                                           김경성

스무엿새 동안 살았던 집의 벽과 천장에는 수없이 많은 길이 거미줄처럼 얽혀 있었다

 

길 바깥으로 나가는 일이

한꺼번에 몰려드는 뜨거움 같은 것이었다

별들이 돌아눕는 새벽이면 그늘 떨구는 종려나무도 긴 이파리로 길을 풀어내며

어둠에 묻혀 있던 것들을 하나씩 불러냈다

 

여러 갈래의 길이 몸을 풀 때마다 숲에서는 새들이 날아올랐다

작은 방에서 퍼져 나오는 수많은 길 중의 하나를 움켜쥔 채

중신에서 벗어난 길을 이야기하는 당신의 어깨가 붉다

 

길 끝에 피어 있는 꽃을 꺾으려고 얼마나 오랫동안 걷고 또 걸었던가

수없이 많은 물의 집이 세워졌다가 스러졌다

내 안에 들어온 것은 시든 꽃뿐이었는가

젖무덤을 파고 잘 여문 꽃씨를 꺼내 든다

 

황홀경의 우물을 빠져나올 때 내가 붉었던 것처럼 당신도 지금 붉다

 

어미 새는 제 깃털을 뽑아서 조롱 속에 방을 들였다

둥근 방을 빠져나와서

길의 파편 위에 모로 누워 있는 어린 새,

꿈틀꿈틀

꿈 튼다

 

3. 유목의 시간

                                     김경성

떠나는 것들은 그 사연조차도 말하지 않는다

다만 바람이 불어가는 쪽으로 비가 긋고 가는 길을 따라 흘러갈 뿐

어제는 비가 와서 꽃이 피었고, 꽃을 먹은 양 떼는 넘치도록 젖을 내어주었다

문을 열어 바람을 들인다

몸속에서 키우는 숲 속 나무가 잎을 편다

 

해와 달이 둥근 창으로 드나드는 사이

초경을 건넌 처녀는 제 몸속에 아이를 들이고

건너고 또 건너서 닿은 구릉 너머에서는

말을 타고 달리던 청년이 입안에 고인 침으로

새들을 키운다

높이 나는 새가 먼 곳에서 부는 마른 바람의 서걱거림까지 그대로

청년의 입속에 넣어준다

 

사막에서 집들은 고래가 되어 엎드려있다

고래 뱃속에서 자라는 나무가 한꺼번에 몸을 포개어

지느러미를 흔들어댈 때

고비 사막에서는 물 흐르듯 몇 마리의 고래가

앞으로 나아가는 것을 볼 수 있다

유목의 시간은 그렇게 게르에서 시작해서 게르에서 익어간다

 

4. 음계를 짚어가는 손가락이 낯설다

                                             김경성


오래전에 다 익혔던 낡은 악보처럼 둥그렇게 휜 목덜미가 아니어도
방파제에서 홀로 연주한다는 것만으로
누군가에는 충분히 위안이 되는 시간

예감인 듯 바람이 불고 마른번개가 일며
아코디언을 수없이 폈다가 접으며 바람을 읽는 바다
그 젖은 마음이 멀리 퍼져 방파제를 넘어섰다

건기가 발을 빼고 우기의 이마가 보이는 계절
방파제에 앉아있는 수많은 사람의 눈에도 바닷물이 차오르고

바다를 들인 기타로 연주를 하는 젊은 여행자의 낯선 손가락이

어느 순간 따스했던 기억을 불러낸다

 

저만치 홀로 앉아있는 한 사람,

어떤 슬픔을 지고 있는지 오른쪽 어깨가 내려앉아 있다
잃어버린 것이 무엇일까


처연한 상실도 때로는 뿌리가 돋느라 짙은 향기를 낼 적이 있다고
낯선 손이 빚어내는 소리를 들이며

기울어졌던 몸이 점점 펴지고 있다

모르는 사람들이 모두 아는 사람이 되어서

음계를 짚어가는 낯선 사람의 마음 안으로 다 들어갔다

저녁 하늘이 바다보다 더 짙푸르다

 

5. 느티나무 룽다

                                     김경성

불이 지나간 자리가 차다

 

그을음이 울음으로 읽히는 석조대좌에 바람과 구름이 빚어내는 이끼 꽃이 뒤덮여 있다

불길이 지나간 그 속에는 스치기만 해도 전 생애가 흔들리는 간절한 기도가 들어있다

 

귓가를 스치던 것들의 소리와

멀리 혹은 가까이 바라봤던 것들을 제 몸속에 넣어두고

민흘림기둥이 있던 주춧돌 아래 옛 길을 숨겨놓았다

 

홀로 서서 느티나무와 거리 재기하며

그림자로 말을 주고받는 삼층석탑

풍탁 소리 번지는 자리마다

지나간 시간을 다 들어 올릴 듯 꽃다지 냉이 꽃 피었다

잠들어 있는 것들도 뒤척이며 조금씩 길을 풀어 놓는다

 

불길이 지나갈 때 하늘 모퉁이에서 몇 번이나 적란운이 나타났다가 사라졌는가

아직도 숨 닫지 않은 우물에서 흘러나오는 물줄기와

천 년 전의 기억들은 모두 명주실 같은 실핏줄이 되어서 회랑을 돌아다닌다 

 

거돈사지 느티나무,

봄이면 가지 끝에 내다 거는 룽다를 헤아리는데 천 년이 걸렸다

수억 만 장의 이파리룽다에 그물 무늬로 새겨놓은

옴마니반메훔

폐사지의 주불전이다

 

6. 오래된 서고

 ㅡ 격포 바다  

                                     김경성

 

  1

  서고의 열쇠를 잃어버렸다

  바다에 빠트린 열쇠를 찾으려면 아침을 기다려야 한다

  초승달이 바닷물에 옅은 빛을 내려놓을 때 바다는 초승달 빛만큼의 길을 물 위에 그려놓았다

  새벽안개가 바다 안쪽까지 감싸 안은 팔을 풀어놓자 거짓말처럼 서고의 문이 열렸다 누군가 읽다가 접어놓고 간 책을 펼치니 흠뻑 젖어있다

  별들이 사산한 불가사리가 책꽂이 아래에 떨어져 있다 무엇을 움켜쥐고 있었는지 불가사리의 다섯 손가락이 아직도 구부러져 있다

  끝이 아니라고 잠시 뒤돌아 나가는 썰물의 끝자락을 움켜쥐었지만 나는 끝내 그곳을 떠나지 못하고 습한 서고에 앉아서 읽지 못하는 상형문자를 손가락으로 따라 그렸다  

  툭 하고 어깨를 치고 가는 바람이 아니었다면 그대로 주저앉아

  한 생애를 다 보낼 것만 같았던 봄날이었다

 

  2

  길을 접어서 몸속에 말아 넣은 소라는 모랫바닥에 엎어진 채 구겨진 길을 풀어서 바다로 밀어내고 있었다

  괭이갈매기들은 동백꽃 빛 무늬가 있는 부리를 연신 모래 속에 묻었다가 꺼내더니 바다 쪽으로 날아갔다

  백사장에 흩어져있는 새들의 말과 책 속에서 흘러나온

  말들을 하나하나 어루만졌다

  저릿한 말들이 손바닥으로 스며들었다

  오! 온몸 가득히 느껴지는 오르가즘

  화라락 불붙듯이 한꺼번에 서고를 덮치는 해일

  속수무책이다

 

7. 화장암華藏庵

                                     김경성

뱃가죽이 붉은 뱀 한 마리가 길바닥에 뒤집혀 있다, 한 번도 누워본 적 없다는 듯

기다란 몸이 물결처럼 길을 건너가는 사이

뱀의 등뼈가 부서지도록 누군가 밟고 지나갔다

길바닥에 선명하게 남아있는 자국이 아니어도 순간이 빚어낸 참혹한 스침이다

 

몸을 구부려야 들어갈 수 있는

물푸레나무도 제 몸을 둥그렇게 구부려서 돌담에 기대고 있는 화장암華藏庵,

죽은 뱀을 뛰어넘어서 찾아갔으나

스님은 없고 

풍경소리만이 절마당을 돌아나와 낯선 사람들의 발걸음을 멈추게 한다

 

오월의 작약은 제 향기를 이겨내지 못한 채 이끼 꽃 핀 담장에 꽃잎을 털어내고 있다

세월의 무게만큼 빛이 바랜 빗살문의 그림자가

먹물을 엎지른 듯 번진다

 

말 없음으로 텅 빈 하늘과 텅 빈 암자를 가득히 채워가는,

달 속에 있는 듯

점점 부풀어 오르는 달 안을 거니는 듯

고요의 담장을 두르고 높은 곳에 떠 있는

적막하고 쓸쓸한 암자

 

*경상북도 문경시 운달산 중턱에 자리한 김룡사의 산내 암자

 

8. 모란문 찻사발과 바다

                                     김경성

속성을 잃어버린 것들도 긴 시간 끝으로 가서 보면 처음의 마음이 남아있다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 입술의 지문은 지워지고

밀물과 썰물의 주름을 타며

인도차이나반도 눈썹 끝에 올라가 있다

 

뿌리가 없는 그는 바닷속에 노숙할 집을 지으며

가끔 바다의 등지느러미에 올라가서 별이 되고 싶었으나

바닷속 둥근달로 떠 있다

 

찻잎을 담고 차향을 머금었던 몸으로 따개비를 끌어안았지만

세상 밖으로 나가는 일은

보이지 않는 길을 찾아 날아가는 새들의 부리만큼이나

단호하게 닿을 수 없는 뜨거움이었다

 

모란꽃에 붙은 따개비의 가계는 꽃잎 번지듯 천천히 몸을 불려 가고

닻을 내린 목선木船의 휘어진 선미에도 오를 수 없는 아득함

그 누구에게 위안이 될 수 있을까

 

오직 우물 같은 몸 안에 바다를 담아놓고

수평선의 본선이 되고 싶을 뿐

 

찻사발 모란꽃에서 날갯짓하는 나비 위에

휘어진 실금이 어디론가 가고 있다

 

9. 검은 부리에 관한 기억

                                     김경성

머루 덩굴에 긴 이야기를 쓰고 있던 저녁,

새들이 검은 실을 물어다가 하늘 이쪽저쪽 매듭을 짓고는

연못에 빠진 별들을 건져내고 있다

이윽고 초승달 하나 목에 걸치고 뒤뚱거리는

새의 날갯짓이 긴꼬리제비나비 같다

 

몸보다 머리가 더 큰 어린 새의 붉은 몸에서 회색빛 깃털이 자라고 날개는 조금씩 바람의 결을 읽기 시작하면서

갸웃거리던 날개 끝에서 바람의 혹점이 생길 때

 소리 이울기 연습을 했었다

 

새들이 소리를 낼 수 있는 것이라고, 날개만 있으면 높이 날아간다고 생각했던 것이 오독이었다는 것을 아는 데 한 달이 걸렸다

무엇이 목에 걸린 것처럼 꺼어억 꺽 거리며

종이를 물었다가 놓았다가

다음에는 나뭇가지를 물었다가 놓았다가

검었던 부리가 복숭아 꽃잎빛깔이 되었을 때 그때부터 씨앗 껍데기를 벗겨낼 수 있었다

 

내 몸의 배꼽처럼

검은부리가 언제나 몸의 중심이 되어

세상의 조롱속을 오르내렸다

 

생각의 언저리를 물어다가 마음의 중심에 가져다놓는 일, 내가 당신을 알아가는 것만큼이나

더디고 더딘 일이었다

 

10. 파미르에서 쓰는 편지

                                     김경성

마음의 뷰파인터 속으로 들어가 있는 풍경이 익어서

암청빛 저녁을 풀어놓을 때 별들이 쏟아져 나왔습니다

 

세상의 별들은 모두 파미르 고원에서 돋아난다고

붉은 뺨을 가진 여인이 말해 주었습니다

 

염소젖과 마른 빵으로 아침을 열었습니다

돌산은 마을 가까이 있고

그 너머로 높은 설산이 보입니다

 

아이들의 눈빛이 빛나는 아침입니다

나귀 옆에 서 있는 사람의 그림자가 나무 우듬지에 걸쳐있고

풀을 뜯는 나귀의 등에는 짐이 없습니다

 

아이들의 웃음소리에 백양나무 이파리가 흔들릴 때

왜 그렇게 먼 길을 떠나왔는지 알게 되었습니다

주머니에 가득히 주워 담은 별들이 차그락거립니다

 

당신은 멀리 있고 설산은 점점 가까워지고 있습니다

 

고원에 부는 바람을 타고 나귀가 걷기 시작했습니다

나귀가 노인을 이끄는지

노인이 나귀를 따라 가는지

 

두 그림자가 하나인 듯 천천히 풍경 속으로 들어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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