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시 '정수경 시인'

붉은 꽃말 외4편


정수경 약력

*경북 문경 출생.

*한국방송대학교 국어국문학과 졸업.

*《시로여는세상》신인상으로 등단

*시집 『시클라멘 시클라멘』이 있음

 

 

 

 

 

 

1. 붉은 꽃말

                                                                   정수경

 

유월에 당신은

붉은 장미를 가장한 말의 이면에 대해 연연해서는 안 된다

 

잘 맞는 옷 입은 말은

어이없이 저쪽 담장에서 되돌아오는 일이 없기 때문이다

 

발설되지 못하고 입술에 선명하게 남은

꽃말의 보송한 날개에도 때로는 가시가 돋는다

 

그러나 말의 상처를 건드리는 일은 용납되지 않으므로

물 위에서 지워진 새의 발자국처럼 가시는 부드러워져야한다

 

뿌리 없이 무성한 말은 

투명한 물방울무늬 속으로 들어가는 저녁 무렵을 떠올리고 

 

말의 잔치는 향기로운 꽃의 나날

검은 해가 꽃 피는 시절의 향기를 거두어 쓸쓸히 서쪽으로 쓸어간다

 

입술 기억하는 핏빛 말들이여, 허공을 떠돌다 떠돌다

적당히 무른 곳 찾아 밑줄 아래 그만 앉아 있으라

 

바람이 수시로 말의 그늘을 흔들고

구름은 발효된 침묵의 비를 뿌리며 지나가느니

 

시침과 분침이 유행처럼 지나가는 길목

어느 심장 지나온 꽃말이 장미의 種을 흉내 내고 있다

 

 

 

2. 최북崔北

                                                      정수경

 

축시(丑時)의 먹물 속

몰아치는 눈보라 뚫고

북쪽으로 북쪽으로 훨훨 나는 새 칠칠(七七)  

붓 입에 물고 날다

툭, 떨어뜨린다 짖던 개가 받아 삼킨다

 

성벽 아래 잠든 그는

화선지 바깥이 안방인 양

불기 없는 한데가 오히려 아랫목

웅크린 잠을 안고

흰빛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중이다

 

한쪽 눈 찔러 거기에  

태양을 심었다 빛이 뿌리 내리고

붓끝 따라 가지를 뻗어

산을 세우고 강을 만들고 구름을 띄워 새가 날고

새벽을 불러 안개 속에 길을 내면

한 세상이 저문다 한들

종이 한 장보다 무거우랴

 

술 한 병과 두부 한모에 그림을 바꾸던

그가 벽 없는 집으로 돌아간다, 훨훨

살을 에는 바람 붓끝에 묻혀

댓잎에 눈발 날린다 칼바람을 쏟아낸다

불을 삼킨 뜨거운 언어들이 먹물에 몸을 녹여

구만리 긴 하늘로 잠겨가는 새

훨훨 칠칠(七七)

훨훨 칠칠(七七) 

 

검푸른 북명(北冥)의 바다

한 마리 곤(鯤)의 꿈이 얼음장 밑에 슬프다

 

 

 

 

3. 상처를 사육하는 법

                                                         정수경

      

구름 내부에는 밀고 당긴 어깻죽지의 상처가 있다 

 

예고 없는 구름의 부피는

상처가 사육하는 우울의 왼쪽

 

불빛 몇 줌은 어둠 속을 적색 광선으로 달리고

쏟아지는 비는 빗속을 구름의 무게로 달린다

 

내가 쓴 편지를 내 몸 속에 집어넣는다

비의 날을 모르던 네가

표정 잃어버린 얼굴로 빗속을 건너오듯,

새총으로 고요를 당겨 붉은 비행을 쏘아 올린다

 

붉다는 것은 제 속 죽어가는 것들을 수놓고 있다는 것

구름 내부를 왼쪽에 앉힌다는 것

 

이마를 짚은 생각의 그림자가

순한 골목 돌아 나오면  

생선가시처럼 드러난 햇살로

아무도 찾지 못하도록 우울의 은신처를 지운다

 

유리창 너머 표류하는 구름 모서리들이 떨어져 내린다

나를 빠져나오지 못한 편지는

마지막 식물성 잃어버린 몰약의 계절을 찾고 있다

 

 

 

 

4. 슬픔은 15도로 기울어진다

                                                                   정수경

 

 

관목과 잡초로 둘러싸인 북쪽城,
두렵고 말라붙은 시간들이

당신을 스케치 하고

먼지 쌓인 회전판 위에 철사로 뼈대를 세워

거푸집을 짓는다

당신이 돌아오지 않는 밤은 길었다

 

손끝으로 더듬어 체온을 만진다

희미해지는 콧날을 세우고

입술과 귓불 불러 흉상을 만든다

사랑은 나를 파괴하는

신성한 불꽃,

격정의 순간이 오기 전까지

하얀 드레스를 입은 열아홉 살이었다

 

당신을 조금만 벗어나면

고장 난 나침반처럼 흔들렸다

그 길은 때때로

망각의 늪으로 이어져갔고,

늪의 끝에서 더 선명해지는 것은

실핏줄로 흐르던 당신이라는

햇살과 어두움이었다

붓으로 석고액을 바르고 찰흙을 파낸다

 

돌가루처럼 떨어지는 한숨을

석고 틀 안쪽에 비눗물 대신 바른다

사랑보다 길었던 당신의 그림자가

오직 하나뿐인 나의 바다였을까

 

바다를 끌어안은 어둠의 깊이는

늘 그렇게 바닥이 없었다

끓는 청동 물로 빈 바다를 채운다

 

맨발로 오귀스트의 바다를 향해 걸어간 나는

까미유 끌로델,

늘어뜨린 머리카락이 당신의 팔에 엉겨도

젖은 몸속에서는

다시 출렁이는 파도 소리가 들린다

 

성에 낀 정신병원 창밖에는

서른세 번째 겨울이

15도 쯤 기울어진 내 슬픔을 기다리고 있다

 

      

 

5. 줄탁啐啄

                                                                   정수경

    

 

허공을 품은 죄로 나는 백 년 동안 부화되지 못했습니다
껍질과 실랑이 끝에 깨어나면 흠뻑 젖어 있곤 했지요

 

열망의 열쇠를 쥔 날개가

뷰박스 필라멘트처럼 푸드덕거렸습니다

 

껍질의 조밀한 실체를 풀기에는

내 견고한 힘줄이라도 역부족이었습니다

번개와 새떼가 번갈아 나타나고

날씨보다 풍향계가 먼저 돌아가고 있었습니다

 

날지 못하는 날개의 기억은 고여 있는 죽음의 정석이라는

강물의 변주를 들어야 했습니다

턱을 괸 동공 속에서 새들의 행방을 좇아가던 궁리가

하릴없이 구름의 꽁무니를 만지고 있었습니다

 

새들 길들이던 바람이 구름 등을 밀어 전달한

면죄부에 대한 모호한 기별이

맞춤형 소각장에서 흘러나오는 불티에

발목이 걸려 넘어지곤 했지요

 

날개에 이끼를 키우며 부화를 거절하던 시간이

타협 쪽으로 자리를 바꾸고 틀어 앉았습니다

 

폭우의 밤에 목을 매고

비상의 순간을 기다리던 시간 겨드랑이가 비로소

간지러워지고 있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