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시 '오영록 시인'

나무의 기억 외 4편

[이름]오영록
[약력] 강원도횡성출생 다시올문학신인상
문학일보신춘문예(시부문)
머니투데이 신춘문예(시부문)
대전일보 신춘문예(동시부문)
경기도 경기천년체 전국공모전 대상
의정부전국문학공모전 운문부문 장원
경북일보전국문학공모전수상
산림문화전국공모전수상
문경새재 전국창작시 공모전 희양산 상
청계천문학상수상 제6회 청향문학상

저서:빗방울들의수다(성남시창작지원금수혜)
       묵시적계약(성남시창작지원금수혜)
       키스(성남시창작지원금수혜)
공저:슬픔의각도외다수
 
 

 

 

 


1.나무의 기억
                                                                      오영록
 
여름을 지나 가을인데 나뭇가지 마디마디가 욱신거렸다
표피를 찢으며 꽃망울이 올라올 때와 같은 통증
 
가을이어도 이렇게 꽃피우기 좋은 따스한 날이면
봄의 그 어느 날로 기억하는 나무
 
무성했던 잎은 하나둘씩 다 떨어지고 있는데도
나무는 오늘도 꽃몸살을 앓는다
 
누군가를 사무치게 그리워했던 달빛에 나무는 또 몸서리를 치고
비가 오는 날이면 우산도 없이 그 비를 다 맞으며
벌 나비를 기다리는 소녀 같은 나무
 
그런 다음 날이면 꽃눈이 피었던 가지를 유심히 본다
꽃 한 송이 없음이 새삼 놀랄 일도 아니지만
가지 어디쯤에서 만개했을 것만 같은 착각
 
꽃 향에 벌 나비가 잉잉거리고
노란 꽃, 빨간 꽃으로 꽃등을 환하게 켜는 꿈을 꾸지만
가지마다 소복소복 하얀 꽃등을 하사받은 나무는
밤새 또 젖몸살을 앓겠다.
 
 

 


 
2.구름 공방(工房)
                                                                       오영록

가천대역에서 태평동 산 9번지로 막 좌회전을 하고 보면
구름 공방이 있다
들어가 보니 맥주와 양주뿐
그리고 메뉴판이라야 겨우 간단한 안주가 전부다
저것이 무슨 공구란 말인가
 
구름은 보이지 않고 한 무리 또 한 무리 들어와 원탁에 앉는 사람들
한 순배 두 순배 술잔이 돌수록 느슨해지는 언어들
덩달아 흐물흐물해지는 사람들
 
맨 먼저 시작한 팀은 조탁이 다 끝났는지 자리에서 일어서는데
다리가 흐물흐물하다
아니 뭉게구름처럼 뭉실뭉실하다
사람은 본디 구름이었나보다
혀가 꼬인 것이 아닌 구름의 언어로 말을 한다
공방 주인은 구름 언어에 능통했다
 
속상한 일도 있고 기왕 들어왔으니 큰맘 먹고 양주 한 병 시켰다
서너 잔 홀짝거리다가 보니 가을날 예쁜 뭉게구름이 눈앞에 어른거렸다
주머니에서 구름을 꺼내 값없이 계산하고 공방을 나서는데
구름 위를 걷는지
구름 걸음으로 집을 향하는데 둥실둥실 하늘을 난다
 
힘들이지 않고 구름이 될 수 있는 공방
이 몸뚱이가 구름이었다는 사실
그래서 언젠간 구름이 되고
또 공방의 만찬을 받기도 했었나 보다.
 
* 공방(工房)은 생산이나 수리를 위한 공구와 기계 따위를 제공하는 공간이나 건물
 
 

 

 

 

3.지퍼들
                                                                      오영록

누군가 보고 싶거나 얼굴이 아른거릴 땐 단추 달린 옷이나
똑따기가 달린 옷은 자칫 울컥이 빠져나올 수 있으므로
꼭 지퍼를 입는다
 
바지며 속옷이며 점퍼까지 몇 겹의 지퍼로 바람 한 점 드나들지 못하게 막아야 한다
그래도 바람이 들어오는 것 같으면
좌심방과 우심실 사이 지퍼도 바짝 올려야 한다
 
그래도 어깨가 들썩인다든지 한다면
아랫니와 윗니를 조금 엇물리게 꽉 물어야 한다
그것으로도 부족한 날은 윗입술과 아랫입술이 잘 맞물리도록 엄지와 검지로
왼쪽 입꼬리를 잡고 오른쪽 끝까지 단단히 채워야 한다
 
그것으로도 감당이 안 되고 코끝이 울먹거린다면
짙은 선글라스로 눈을 채우는 방법도 효과가 있다
그 울컥거림이 백회혈을 넘실거린다면
어떤 꽃무늬 단추로도 잡아둘 수 없으므로
 
지펴가 유행할 수밖에 없는
지퍼를 좋아하지 않을 수 없는
지퍼가 없으면 안 되는
 
당신의 지퍼는 오늘 안녕하신지
남들 눈도 있으니 슬쩍 한번
왼손으로 더듬더듬해 보시지요.
 
 

 


4.Y에 대한 보고서
                                                                      오영록
고추 농사를 짓는다
예전에는 없던 탄저병
아마 이 병도 우연의 일치라고 보기엔 조금 무리가 있게
에이즈와 동시에 출몰했지 싶다
 
예전 같으면 그저 거름이나 주고 말리기만 하면 됐던 고추 농사가
이제는 탄저병을 막지 못하면 고추 농사는 포기해야 하는 지경이니
그렇다고 안 먹을 수도 없고 명맥을 끊을 수도 없고 짓기는 짓는다만,
 
밭갈이에 퇴비며 비료는 넣지만, 예전에 없던 살충제도 넣어야 하고
가장 중요한 탄저병약을 이랑 만들 때 꼭 필수로 넣어야 하니 약 위에 고추를 심는 격
 
모종을 사는데 이미 고추가 달렸다
Y자로 벌어지는 고사이에 달리는 고추
벌써 손가락 마디만 한 고추가 탐스럽다
모종 파는 아주머니 고춧대를 좌우로 마구 흔들어 보이며 얼마나 빳빳하냐고 너스레다
조금만 부실해도 모살이에서 큰 차이가 나기 때문이다
 
꼿꼿해야 하는 것은 모종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다
두 손으로 공손히 잡고 꼿꼿하게 심는 것도 모자라 지지대도 꼿꼿하게 세운다
이제 모종이 아닌 Y의 시작인 고추나무다
 
고추나무가 가장 먼저 배우는 것도 Y다
Y 사이에 고추를 다는 일
Y에서 다시 Y를 그 Y에서 또다시 Y를 다는 일
Y마다 고추를 다는 일이 고추나무가 가진 유전자다
 
고추는 마지막까지 꼿꼿해야 한다
꼿꼿하지 못하고 구부러지면 거름이 떨어져 토양의 힘이 다 됐다는 신호
한번 수확할 때마다 충분히 웃거름을 줘야
빳빳하고 꼿꼿한 고추를 딴다.
 
고추꽃은 꼭 Y 그사이에만 핀다.
 
 


 
5.켜
                                                                      오영록
 
물끄러미 바다를 보고 있다
철썩이는 파도가 바다의 전부라고 읽는 눈을 슬그머니 질책하고 있다
 
일었다가 스러지는 순간은 그저 파도의 한 생일 뿐이지 바다는 아니라고
허옇게 뒤집어지는 파도의 뒷면 아니 바다의 뒷면을 본다
 
한 켜가 일어섰다 넘어가는 페이지다
잔잔한 작은 파도도 높고 넓은 해일을 순간도 그저 하나의 켜일 뿐
바다 전부는 아니라며
갈매기가 파도 한쪽 귀퉁이를 물고 켜 하나를 뒤집고 간다
 
시푸르게 보였던 파도의 뒷장을 보니
수천수만 쪽의 잠언이 아닌가
또 하나의 파도가 일어섰다가 오늘이 역사를 물고 바닷속으로 든다
 
염장 되어 깊이 수장되는 오늘의 이 일기장이
언젠가 음식의 소금처럼 약이 될 것이다
 
소금의 단면을 보면
쥐라기 시대의 공룡 발자국이 있잖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