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시 '김순진 시인'

겨드랑이 성경 외 9편

 

경기도 포천 출생, 아호는 녹산(鹿山)
한국방송통신대학교 국어국문학과 졸업
중앙대학교 예술대학원 수료
고려대학교 평생교육원 시창작과정 강사
한국방송대학교 국어국문학과 서울지역학생회 시창작강사
계간 <스토리문학> 발행인, 도서출판 문학공원 대표
한국스토리문인협회 회장
은평문인협회 회장, 은평예총 회장
중앙대문인회 수석부회장, 서울문인협회 이사
한국문인협회 이사, 한국현대시인협회 감사, 
국제PEN한국본부 이사, 한국시문학아카데미 회원
시집 『광대이야기』,, 『복어화석』
     『박살이 나도 좋을 청춘이여』, 『더듬이주식회사』
장편소설 『너, 별똥별 먹어봤니』
단편소설집 『윌리엄 해밀턴 쇼』
수필집 『리어카 한 대』, 『껌을 나눠주던 여인』
칼럼집 『천만에 만만에 콩떡』
장편동화 『태양을 삼킨 고래』
평론집 『자아5, 희망5의 적절한 등식』
시창작이론서 『좋은 시를 쓰려면』
            『효과적인 시창작법』
문인탐방기 『시문학파를 만나다』 
가곡작시악보집 『깻잎반찬』
편저 『애인』 외 다수
수상 : 수필춘추 문학대상, 2016 자랑스러운 한국인대상 외 다수
겨드랑이 성경 외 9편

 

 

 

 

 

 

1.겨드랑이 성경
                                                           김순진

나는 내 겨드랑이를 믿는다
언젠가는 날개가 돋아날 내 겨드랑이를 믿는다
병아리가 그랬던 것처럼 꺼병이가 그랬던 것처럼
겨드랑이에 날개가 돋아나려면 빈 팔을 마구 저어야 한다
자꾸만 빈 팔을 저어 허공에 동그라미를 그리다 보면
언젠가 내 겨드랑이에는 날개가 돋아나겠지
그날이 내일일 수도 있고 10년 있다 돋아날 수도 있다
어쩌면 내가 죽어서야 관을 박차고 날아오를 수도 있을 거야
그래도 나는 내 겨드랑이를 믿는다
그래서 오늘도 할머니의 짐을 들어드리고
외국인을 만나면 짧은 영어로 길을 가르쳐준다
마치 여행 왔다가 돈이 떨어진 양 일본말을 써놓고 구걸하는 청년이
수작임을 뻔히 알면서도 만 원짜리 한 장을 건네며 밥을 사먹으라 한다
병아리가 물 한 모금 먹고 하늘을 쳐다보는 이유는 날고 싶어서일 거야
나도 하늘을 날고 싶어 자주 하늘을 본다
땀이 날 때면 혹시 날개가 돋는 건 아닌가
겨드랑이를 들여다보면 곧 돋아날 것만 같은 날개의 기미가 보인다
나는 내 겨드랑이를 성경말씀처럼 믿는다
그래서 겨드랑이에 돋아날 그 아름다운 날개를 믿으며
겨드랑이 밑에 감춰진 천사의 날개를 위해 팔의 수고를 아끼지 않는다
오늘도 나는 마음을 나누고 물질을 나누며 사람의 향기를 나누어
마침내 천사를 꿈꾼다

뭐, 시인은 이미 천사와 동급일 테지만

 

 

2. 카타르시스 육모법
                                                           김순진

나에게 어둠의 할부가 끝나가고 있어 아쉽다
어둠을 더 대출받지 못해 너무나 아쉽다
나에게 어둠은 최고의 가치였다
나이가 들자 내 어둠에 자꾸만 밝음이 기생하려 한다
엄마가 죽고 세 달도 안 돼 아버지가 새엄마를 데려왔을 때
나의 계절은 철저히 어두웠다
그믐밤 같은 날이 청춘 내내 지속되었다
반항과 가출은 내 어둠의 잘생긴 얼굴이었다
첫 공장에서의 임금체불과 신체적 가학에서 
나는 꿈이나 미래 같이 허황되고 부조리한 빛을 차단키로 했다
쉰아홉 살의 나이에 아직도 사글세를 전전하고 있는 내가 
여전히 어둠을 사랑한다고 사람들은 조소하겠지
그러나 어둠이야말로 나의 신실한 애인 
어둠은 내가 오르가슴을 요구할 때마다 튼실한 엉덩이를 들이민다 
백주대낮에 무엇을 할 것인가
온갖 번쩍거림을 매단 시인이라니 가당키나 한가
시시덕거리며 꽃을 보느니 차라리 골방에 곰팡이를 키우겠다
  
잔뜩 어둠을 채운 내 서재엔 
곧 시밭에 이식될 카타르시스가 빼곡히 자라고 있다

 

 

3.복숭아꽃 
                                                           김순진 

 복숭아나무는
소리를 엮어 꽃잎으로 내놓는다
촘촘히 나올 잎사귀,
그 귀를 온몸에 감추고
세상을 엿들어 꽃잎을 엮는다
두엄을 잔뜩 싣고 외양간을 나오는 경운기소리와
아버지 목울대를 넘어가는 막걸리소리
파밭에 모여드는 일벌들의 농요를 들어야 꽃잎이 된다
먼 바다로부터 달려오는 바람소리를 휘감고
땅속으로 흐르는 물소리에 귀를 대고
한겨울을 견뎌야 꽃잎이 된다
할미새가 읽어주는 봄의 의미를 온몸으로 느껴야 
비로소 모든 가지에 꽃을 내놓아 만개한다 
 
판소리 적벽가 한 마당
스스로 완창을 한다

 

 

4.버려진 밥상을 리폼하다
                                                           김순진

이사 가는 집 벽 한켠에 밥상 하나 버려져 있다
군데군데 상처가 나고 다리가 삐걱거리는 밥상
한 식구의 생사가 저곳에서 해결되었으리
아이들이 배고프다며 밥 달라고 아우성을 치고
엄마는 고작 계란프라이를 지져내면 아이들은 최고의 만찬을 대했으리
뚝뚝 흘리는 자장면 면발과 밥풀들을 받아내면서
맨날 김치뿐이란 투정이 아이를 위로 위로 밀어올렸으리
때로는 실직한 가장이 비통한 술잔을 기울이면
아내는 옆에서 말없이 바라보았으리
생일 케이크가 수도 없이 올라가고
축가를 부르며 박수를 치는 고사리손에 축복이 내렸으리
문득 그 가계의 숟가락소리 부딪는 소리가 들려온다
긴 장대를 일사불란하게 두들기는 한 부족의 축제가 들려온다
숲을 이루던 한 나무의 생을 외면할 수 없어
누가 볼까 슬쩍 가져다가 줄을 두르고 종이를 붙여 리폼을 한다
하여 나는 책이 된 나무와 책꽂이가 된 나무와 책상이 된 나무와
찻상이 된 나무의 저 아늑한 숲에서 오래오래 살기로 한다

 

 

5.더듬이주식회사
                                                           김순진

종로3가 지하철 3호선에서
청량리역 쪽으로 가는 1호선 열차로 갈아탔다
열차 칸 사이에서 살짝 눈을 뜬 가짜 맹인 두 명이 
3분 사이로 찬송가에 발을 맞춰 엉거주춤 걷고 있다
움푹 팬 눈이지만 희망의 감자눈을 잃어
구걸로 연명해야 하는 그들
어느 병원에 문병을 갔다가 
꾀병도 병이라는 표어를 본 일이 있다
삶이 얼마나 고됐으면 멀쩡한 사람들이
눈을 감고 더듬이를 택하였을까
등에 멘 달팽이집가방에 천 원짜리 몇 닢 넣은 그가
삶의 점액질을 발산하며 달팽이 발을 질질 끈다
하지만 그들의 눈을 떠주기 위해 목숨 거는 
심청이도 뱃사람도 보이지 않는다

그들에게 지팡이는 길을 더듬는 도구가 아니라
더듬이주식회사 사원의 사원증이었던 것이다

 

 

6.어둠에 관한 상념
                                                           김순진

어둠이라는 말은 
캄캄하다는 말도 잠재운다는 말도 아니다
어둠은 태양을 배제하지 않으며
닭을 구속하지도 
별을 숭배하지도 않는다
어둠은 누룩과 같이 술과 같이 서로를 익히고 있을 뿐
국화의 만개를 위해 어둠이 필요악이라는 가설은
철저히 무시되어야만 한다
어둠은 철저히 어두울 때 빛날 뿐
어둠은 결코 폭력이나 죽음에 대해 관대하지 않다
어둠은 마음을 훔치는 도둑이 아니다
이별이나 곤궁에 대하여 어둠을 웃거름하지 말자
어둠의 나직이 외치는 저 지하의 소리에 대하여
급박하게 접근한다
어둠은 강도야 불이야
그런 다급한 소리에 소경이다 
숨죽이며 담을 넘는 한 가장의 발자국소리를
증명하기 위해 어둠은 눈을 부릅뜨는 것이다

 

 

7.씀바귀꽃
                                                                         김순진

잇딴 사업 실패에다 출판사까지 차려 반지하에 산 지 15년 만에
응암동을 떠나 불광동으로 이사를 왔다
그토록 인사성 밝다는 내가 바쁘다는 핑계로 
형제처럼 살던 이웃들에게도 인사를 못하고 와 늘 마음이 찜찜했다
그런데 내 전화번호를 아는 이웃들도 사는 게 뭐 그리 바쁜지
요즘 왜 안 보이느냐, 전화 한 통 없어 인사를 가려던 마음이 싹 가신다
그래도 내 도리는 해야지 하며 지인들을 찾아 인사를 돌다가 
내가 살던 집 옆의 채소가게 할머니한테 찾아갔다
우리 집에 푸성귀를 대주느라 배추떡잎처럼 거칠어진 
할머니의 손을 매만지다가 목이 메인다
그리하여 진열된 늙은 호박한테 안부를 묻고 돌아오는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는다
가만히 쪼그리고 앉아 들여다보니
노란 꽃 네 송이가 피어 있었다
그동안 우리 네 식구가 씀비귀같이 산 세월을 격려하며 
골목이 주는 꽃선물이었다
그들도 우리처럼 반지하에서
웃음을 잃지 않고 살고 있었던 것이다

 


8.와불을 만나다
                                                           김순진

백담사 계곡에 들렀다가 수천 개의 돌탑을 보고 
충동이 일어서 탑을 쌓는다
계곡에서 가장 높은 탑을 쌓으려 욕심을 부린다
세숫대야만한 돌 세 개를 굴려다 주춧돌을 놓는다
내 힘으로 굴릴 수 있는 가장 큰돌 굴려다 1층을 올린다
찬물에 들어앉아 가부좌를 틀고 수도중인 부처
돌이불에 석침을 베고 주무시는 부처
건천에 나와 비람과 벗하며 유랑 중인 부처
계곡을 오르내리며 잘생긴 부처들을 선발한다
크기별로 순서에 따라 돌을 들어올리고
작은 굄돌을 주워다 받친다
작은 돌들은 밑에 깔려서도 전혀 주눅들지 않는다
돌탑이 올라갈 때마다 사람들의 이목이 집중된다
내가 우쭐대며 오십억살 위에 오십억살을 올리길 수차례
오십억 살이 넘은 부처들을 겨우 오십 살 막 넘은 녀석이 번쩍번쩍 들어 올려도
투덜거리거나 뛰쳐나가지 않고 스스로 참선에 든다
그렇게 소원을 빌며 13층석탑을 올리고 보니 
결국 정수리에는 가장 가볍게 비운 부처가 올라앉는다

돌탑 쌓기를 마치고 멀찌감치 다리에 서서 바라보았다
그랬더니 바람도 부처 산천어도 부처 나무도 부처
그곳에 있는 모든 것이 부처인 줄 모르고 탑을 쌓고 있었던 거였다
계곡 전체가 열반에 드신 와불이었음을 몰랐던 것이다

 

 

9.집구석
                                                    김순진

  
어릴 적 엄마는 자주 연장을 빌리러 갔다
채칼 한 개 사기 힘든 가정형편에
말도 빌리러 가고
되도 빌리러 가가
가끔 체나 키를 빌려오기도 했다
  
아버지는 탈곡기를 빌려다 콩을 떨거나
홀태를 빌려다 덜 익은 벼를 훑기도
쇠불알저울을 빌리기도 했다
가끔 흙손을 빌리기도 하고
도리깨는 상습적으로 빌리는 물건이었다
  
그럴 때면
우리 집은 안방이나 마루 광 할 것 없이 모두 집구석이 되었다
  
그 집구석은 그까짓 채칼이 몇 푼이나 된다고 날마다 빌려달라는 거야
그 집구석에만 들어가면 안 나와
그놈의 집구석 보기만 해봐라
  
아버지 엄마 동생에 나까지도 모두 싸잡혀서 집구석으로 불렸다
  
그때 빌리려 했던 물건을 모두 살 수 있게 된 지금
집구석 소리가 그리운 건 왜일까
  
집구석은 가난의 비하적인 말이 아니라
화목함에 침범 못할 여섯 식구의 요새였던 것이다

 


10.콩새네 집
                                                           김순진

1967년 연곡리 산 142번지 산자락에
콩새네가 이사 온 것은 화전이라도 부쳐 먹고 싶은 소망이었다
꽃무릇 뿌리를 삶아 연명하고 
칡이나 씹는 것이 끼니꺼리였던 그집
외동딸은 영양실조로 밤이면 앞을 보지 못했다
부녀회 작목반이 기르는 뽕나무밭 사잇길을 쓰러질 듯  걸어가는 그 아이
저 콩새같이 가느다란 다리로 낭창낭창 걸어가는 앤 뉘집 아이야
그때부터 그 집은 콩새네로 불리었다
아침이면 콩새들의 조잘거림을 빈 솥에 안치는 집
돌담불 울타리에 핀 메꽃 웃음을 점심으로 먹는 집
방죽 위로 드리운 저녁노을을 밥상으로  펼치는 집
하얀 얼굴로 낭창낭창 걷던 콩새는 
어느 날 즐거운 방학생활 책갈피 속으로 들어가고
전학 간 그 아이는 우리들 가슴에 사는 텃새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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