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시 '김명아 시인'

붉은 악보 외 9편

 

김 명 아

 

*약력- 전남 여수 출생

2009<시와산문>등단

시집붉은 악보』『물 속의 잠

3회 한국녹색문학상 수상

<시의 밭>시인회 회장, <시와산문>편집차장

한국녹색시인협회, 한국현대시인협회, ()시와산문문학회 회원

 

 

 

 

1. 붉은 악보

                                                                  김명아

출항을 기다리는 여수항 오동도등대 마을에서

첫 불을 밝히고 화물선 모여들고

썰소리 돌아오는 바다를 듣는다

신발코는 모두 집 쪽으로 돌려놓은

손길을 따라 지금도

집집마다 불을 밝히고 있다

 

불빛을 따라 해가 미끄러져 들어온다

어딘가에서부터 나를 깨우는

곁에 앉아 토닥이는 손짓이 있다

몇 해가 흘렀을까

눈길 닿는 곳마다 솟대 세우고

비와 천둥을 부르며 감겨든다

차오르는 목울대, 웅크린 어둠살 너머

붉은 해가 떠오른다

 

법당에 나비가 날아들었다

지난여름 햇살이 꽃살문으로 출렁인다

밤낮이 갈마들고 향초는 불을 물고

솟아오르듯 번진다 나비가 좇던 악보

망설이다 삼켜버린 음표, 붉은 악보가

하늘에 펼쳐졌다 내려놓은

그러나 달려온 얼굴이다

 

 

2. 눌러주세요

                                                                                                                                     김명아

무엇을 보고 싶을까요 시스템이 완성되었어요 눌러주세요 반자동의 의미는 아시겠죠 가끔
은 선택이 필요하거든요 문이 열렸네요 거리가 보여요 살랑살랑 치마가 다리를 올리고 두터
운 점퍼는 골목으로 숨어드네요 두 남자가 기타를 메고 노래하며 코믹멘트를 보네요 거리공
연은 그물을 던져 팔을 잡았어요 한바탕 웃고나자 입벌린 검은 배낭이 지폐를 먹고 싶어 해
요 이웃에 봄이 쓱싹 칠해지길 바라며 풀어진 나사를 조이고 방향을 바꿔봐요

 

휘파람을 불며 용달차가 신나게 달려요 찰랑거리던 햇살도 빤히 쳐다보네요 선이 그어져
있어요 언제부터인지 둔중한 무게가 비켜서고 싶어 해요 가지각색의 안경을 써보고 싶으세
요 거꾸로 가는 시계도 있고 고장난 시계도 있어요 가보지 못한 곳을 볼 수 있는 기회죠 눌
러주세요 안면찰과상을 입은 자존심이 울고 있어요 나오지 못한 자국이 간헐천을 만들고 있
는 거예요 융단폭격을 맞은 곳도 있네요 흉터를 핥으며 선잠 깨우는 손을 잡아요 바다 너머
배꼽 내놓은 섬이 보이네요 재잘거리는 웃음소리, 아침을 여는 소리예요 단추를 채우고 기
린 목을 타고 올라 커다란 눈으로 보고 싶네요

 

한 번 더 눌러주세요 보이지 않거든요 창가에 앉은 놋그릇에 달이 보여요 감사해요 맑은
달은 꿈을 꾸고 있네요 눈맞춤을 하기 위해 다리를 놓아야겠어요 물처럼 흘러갈 수 있겠죠
같은 창에 서 있는지 모르겠어요 바다가 보이기 시작하네요

 

 

3.합니다 사이에 팝니다

                                                                                                                                         김명아

웃음이 남아 있는 볼트를 사고 화장이 지워진 너트를 팔았다 꿈이 깨는 날 톱니바퀴는 필
요 없었다

 

짧은치마를 팔고 긴 다리를 샀다 배꼽티를 팔 때 배꼽을 사고 귀마개를 팔 때 귀를 샀다
안경을 팔면서 눈을 샀고 마스크를 팔 땐 입을 샀다 그러나 긴 다리를 살 때 발은 사지 못
했고 배꼽은 사면서 말라버렸고 귀를 살 땐 들리지 않았다 눈을 살 땐 보이지 않았고 입 속
에는 이가 없었다

 

바늘 없는 괘종시계가 울린다 오후 1시, 서둘러 문을 연다 ‘파마세일 합니다’ 등판을 지
고 물결파마가 출렁이고 베이비파마가 기어 다녔다 눈썹을 짧게 심고 깜박이는 눈꺼풀 위로
‘속눈썹 합니다’ 간판은 머리를 자르고 있다

 

안개꽃 한 다발을 안고 4D 영화를 볼 때 흔들리는 의자에 앉았다 타는 냄새 속에 물방울이
튀었고 안경은 벗지 못했다 물 묻은 선잠을 자다 자리에서 일어나 건강만을 판다는 간판을
내걸었다 잠가지지 않는 문을 열고 배달된 시래기뭉치를 볶아 비빔밥을 만들었다

 

접시를 깨트리며 냄비를 팔고 찌그러진 냄비를 펴며 접시를 팔았다 냄비우동에 조개를 빼
고 시장을 오가는 행인의 다리를 걸고 젓가락을 들었다 멈췄다 불어터진 면발을 세며 귀퉁
이로 몰려드는, 건너야 할 신호등을 보고 횡단보도를 늘리며 넘어졌다

 

 

4.산청 금수암(錦繡庵)에서

                                                                                                                                         김명아

  몇 번이나 넘어지며 갔을까 깊은 밤을 걷고 또 걸었다 부릅뜬 눈으로 잠든, 지리산 너머에
떠나온 자리와 떠나간 사람들을 재웠다 겨울은 빨리 찾아왔고 별은 쏟아지고 잠들지 못했다
삭풍에 닫힌 문 끝에 앉아 흔들리는 풀을 뽑아내고 돌탑을 쌓는다 법당(法堂) 계단 오를 때
마다 다리를 절곤 했다

 도착한 화두(話頭) 찾아 산을 넘고 있다 달아난 귀가 보고 싶었던, 얼음 박힌 눈이 듣고
싶었던, 만삭이 된 입에서 토해낸 말들이 절을 했다 법당에 쏟아낸 말들이 쌓여갔다 무릎이
없어지고 불시착한 혀가 녹아 내렸을까 아침을 깨우는 예불소리 들린다 내려놓은 자리마다
햇빛이 몸을 바꾸고 스님 밥상에 연꽃이 피었다 

 

 

5.벽

                                                                                                                                         김명아

벽을 넘는다 안팎이 모두 벽이다 커다란 입을 가진 벽 뒤엔 또 다른 창살이 있다 줄자를
가지고 토막 난 밤을 건널 때마다 어깨 통증이 왔다 질주하는 회전목마에서 뛰어내렸다

 흐르는 강은 낙관을 허락하지 않았고 모래 한 줌 빌려주며 단단한 이야기를 쓰게 하고 실
어증을 앓았다 감나무에 걸린 얼룩진 얼굴이 떨어지고 밤낮으로 보안손님이 찾아왔다 묶어
둔 저녁은 뒤꿈치가 없다

 분침과 시침이 떨어져나가고 표류하는, 달려드는 벽 앞에서 연결통로는 목이 짧았다 크기
가 다른 창마다 불빛이 새어나오고 목청을 높였을까 오후 다섯 시의 그림자가 숨을 죽인다
밀어내는 벽 앞에서 배인 자리는 잇몸을 드러냈고 가시 박힌 손이 벽을 넘고 있다

 

 

6.그것을 아는지

                                                                                            김명아

이를테면 들쑤신 개미집이 잿더미로 변하고 흘러가던 강물이 
얼어붙은 수면위로 나뒹구는 돌멩이를 잠든 거울에 던졌는지

그러니까 가장 오래된 나미브사막에서 수혈된 붉은 
사막의 속살을 바람의 채찍 받으며 타조가 달리고 있는지

어쩌다 질주 할 수 없는 유목민의 밤하늘을 
타조 깃털 두르고 포식자의 눈을 피해 걸어 나올 수 있는지

어디쯤에서 먹구름 몰려오고 기다리는 우기가 찾아와 
깃털로 알을 품고 일어나 부화된 숨소리 들을 수 있는지

누군가 찾는 이 있어 모퉁이 가로등 기침 하고 벨이 울리고 
머뭇거리다 숨어드는 헛꽃을 부르는 신호 들을 수 있는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늦가을 빗소리에 사방으로 퍼져나가는 
북소리 들으며 주저앉은 횡단보도를 깨울 수 있는지 

언제부턴가 불씨 나누던 땅의 눈꺼풀이 감기고 
심장에 도착한 마지막 얼굴 위해 무릎 내어줄 수 있는지 

아직도 창턱 넘어 반사된 달빛넝쿨이 새벽이슬에 숨을 불어 
넣고 터널 속을 빠져나오는 뒷모습 비춰주고 있는지

그렇게 얼음기둥세우고 벼랑으로 내딛던 웃자란 망설임 몰려와 
여름밤 폭죽소리 한가운데 집 한 채 세우는지, 
 

 

7.더블베이스 앙상블

- 바시오나 아모로사

                                                    김명아

더블베이스가 비행을 시작한다

기댄 듯 붙잡은 듯 흔들거린다

가장 낮은 곳으로 춤추듯 호흡하며

수직의 현을 탔다 거장의 팔은

악기를 안고 도약하듯 해와 달을 넘나들며

천천히 변주된 선율을 연주했다

 

짧고 굵은 활이 현을 그었다 떼었을까

울림통은 바흐의 하프시코드 협주곡을

들려주었고 벌판에 중후한 몸통으로

키다리신사는 섬세한 귀를 열었다

피치카토 주법으로 코끼리를 데려오거나

묵직한 저음의 발자국이 현 위에서

동굴 속으로 사라지기도 했다

 

마지막 악장이 끝날 때까지

관객과 호흡하며 치닫던 더블베이스는

박수를 녹여냈을까 휘파람을 반죽한

달의 눈물은 건기의 물웅덩이를 채우고

저물녘의 징검다리를 건너며

장거리 전화를 붙들고 푸른 문으로 사라졌다

 

 

8. 열일곱 그림자

                                         김명아

잔설을 품고 걸어가는 동안 몰이꾼은

땅을 들춘다 늦봄 산책길에 만났던 맥문동,

보랏빛 촛대가 점화를 시작할 때

먹구름이 몰려왔다 전기뱀장어 꼬리를 벗기던

여름은 그림자를 늘리고 외출을 서둘렀다

 

달리다 머뭇거리기를 몇 번, 가을빛은

불법으로 거미줄을 쳤다 바람계곡을 따라

환청이 들린다 확성기를 들고 따라 다닌다

열일곱 살이 다가올수록 증상은 심해졌다

 

모국어를 잃어버렸고 사각지대에서

신분증이 없다 철부지였던 스위치가 꺼졌다

머릿결 타고 내리는 진눈깨비,

틀어진 등뼈를 세울 수 없는 그림자가 되었을까

헝클어진 밤을 나르며 잔등을 켜둔다

 

 

 


9.물확

                                                         김명아

화강암 쪼아 물확 만들던 날,
물을 담고 파동 일으키며
배꼽 얼굴을 그렸다 동심원同心圓으로
흘러 넘쳤다 몇 해가 지나고
버려진 물확에 빗물 고이고
하늘 담기던 날, 청개구리가 다녀갔다
나뭇잎 떠다니고 돌이 숨 쉴 때
이끼가 자랐다 장마가 끝나고
돌쩌귀 헐거워질 때 어룽거리는
물확 보며 지문을 풀었다

 

물확에서 얼굴이 범람하고
밑바닥으로 흘러들 때 정자체正字體
손바닥 도장을 찍으며 펼쳐 놓았다
붙잡지 못하는 혀를 붙잡고 싶을 때
기댈 곳은 흐르는 물 밖에 없었을까
하현달 아래 늑골 튕기며
땅의 안쪽을 만졌다 땅속 깊이 파헤칠 때마다
자음의 문병객과 모음의 환자 열두 쌍이

심호흡을 했다 옥탑방에서
저무는 해를 보며 한 알의 저녁을 삼켰다

 

 

 

 

10.꽹과리 치며 벌집을 찬다

                                                        김명아

이면지를 뒤적인다 기도의 첫 구절이 된

활자들의 자맥질, 출장 나온

목젖은 술렁이는 사물함에

빗살무늬 그려놓고 체중계를

찾았다 분꽃 입술의 신입사원,

새털구름 엘리베이터 속에서

안내방송을 듣는다 무한 반복되는 인사,

마주친 순간마다 복구되고 삭제되는,

코끝에 머물다 다가서려면 문이

닫혔을까 벽의 등짝은 넓었고

송곳니는 번식중이다 꽹과리 치며

벌집을 찬다 웅성거리는

후유증, 예고편은 상영 중이고

거울 속 레시피가 지워진다

 

한 사람의 땅을 열고 활화산이

솟구친다 산봉우리 삼키고 협곡을 지나

동굴을 뒤덮고 크라잉게임을 한다

불의 옷을 입고 풀리지 않는

소문을 젓는다 찢어진 고막,

비상구 앞에서 탈출구는 없었다

악천후는 도돌이표로 흘러내리고

꺾인 허리가 손금을 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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